사화집에서 읽은 시

내가 사는 법/ 권기만

검지 정숙자 2023. 12. 25. 02:18

 

    내가 사는 법

 

     권기만

 

 

  백 년 후가 궁금해 푸른 이끼로 돋았다

  말라도 다시 살아나는 우기에 한껏 몸 부풀리는 건

  마르고 쪼그라들어도 머나먼 깊이에 생명을 숨겨 둘 수 있어서다

  그러니 눈곱만큼의 그늘은 남겨 두시라 약한 먼지 한 톨 날리지 않아도

  나는 무사하다 장미의 5월은 견디므로 깊어진 내 물관에서 피어난 꿈 

 

  농작물도 아니고 풀도 아니어서 나는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는다

  방치해도 된다는 안심이 나의 생본법, 내 몸이 거적때기처럼 보이는 것도

  그 때문, 물이 많으면 되레 썩는다 황량과 폐허가 달의 근간을 가리고

  서성이는 체온이 바이칼 호수 그 깊이 모를 수심에 닿아 있다

 

  잔디도 아니고 넓게 번식하지도 않는다 기생식물처럼 나무 그늘 밑이나

  바위틈에 산다 먹어 보면 씁쓰름해서 뱉어 낼 뿐 화분의 덮개나 물 마름

  방지가 고작인 나는 무관심을 양식으로 삼아 인간보다 더 멀리 살아남을

  것이다 건기가 세상 전부가 되어도 나는 목마르지 않다

 

  수확되거나 뽑혀 버려진 적 없는 나는 귀하지도 않지만 흔하지도 않다

  위기 식물도 보호종도 아니다 끈질김은 내 모습에선 찾아볼 수 없다

  건들면 너무 쉽게 부서지고 쪼개진다 먹장구름 반나절 분의 입술을 숨겨

  마른 공기에서도 습기를 핥을 수 있는 나는 몸속 수분이 마르면 깊은

  잠에 빠진다

 

  내가 웃을 때 가장자리에서 물소리 흐른다 이슬 한 방울이면 하루가 너끈

  하다 어디서나 나는 평평하다 돌출은 시도한 적 없다 견딤을 적셔 주는

  미량의 수분이 공기 중에 등불처럼 떠 있다 흙더미에 숨어 있는 물이 흘러간

  자취만으로도 나는 걱정이 없다 적게 먹고 덩치를 키우지 않는다 엎드려

  끈질기에 백 년 후를 바라볼 수 있어야 지구의 한 축이 될 수 있다

 

  다투어 피느라 눈 밑이 까만 풀꽃이 나를 비웃고 있다

      -전문(p. 98-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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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요시포럼 제20집 쪼개진 빨강』에서/ 2023. 11. 20. <파란> 펴냄

  * 권기만/ 2012년『시산맥』을 통해 등단, 시집『발 달린 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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