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덧없다, 숨다, 생겨나다/ 안경원

검지 정숙자 2023. 12. 26. 01:36

 

    덧없다, 숨다, 생겨나다

 

     안경원

 

 

  1동과 2동 사이로 까치 예닐곱 마리의 비행

  겨울 저녁 흐린 하늘에 그어진 동선은

  금세 사라지고 새들은 은행나무 빈 가지에

  모여 앉았다. 이름은 몰라도 아는 사이로

 

  너와 나 사이로 나비 날아다닌 적도 있었고

  혼자된 산비둘기가 지나가던 적도 있었지

  나비는 맴도는 동그라미와 길게 끄는 곡선을

  지어놓더니 날아가 버렸고

  산비둘기는 오래 구구대며 지그재그 끈을

  그어놓고 날아가 버렸지

 

  사이를 오가며 실선 같으나 가상의 선을

  끌어가며 얽으며 헝클어 놓기도 하는 그들

  아늑하기도 어지럽기도 가시에 찔린 듯도

  발을 옮겨 짚는다

  극명한 현실이 순간의 주름 속으로 사라지기도 하다니

  빙하의 크레바스 같기도 한

  너와 나, 나와 그, 그와 그들, 그들과 나/너 사이

  흐르는 메신저와 명멸하는 문자들로

  현실은 생성 소멸 중

 

  그러니 실선을 찾지 말기로 하자

  액정화면에 지우개를 집어 유유히 지우듯

  크레바스에 빠진 실선은 얼어붙지 않아도

  분명하여 쓸모없다는데

  이름을 알아도 눈동자 색을 알고 슬픔까지 안다 해도

  구름 벗어난 만년설, 내려다보는 하늘과 함께

  그 산과 눈처럼

  아는 사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안쪽으로 이어진 바람의 시침실을 뜯고

  몸을 좀 더 밀어 넣어 본다

     -전문-

 

  해설> 한 문장: "까치 예닐곱 마리의 비행"을 바라보면서 쓰여지고 있는 위 시는 세계에 대한 시인의 인식이 현상적 사태 이면의 관계의 인드라망에 근거하고 있음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1동과 2동 사이로" 날아든 "까치"는 우연한 존재로서 '나'와는 무관한 흔한 새들일 테지만, 화자는 이들에 대해 "이름은 몰라도 아는 사이"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있다. 순간적으로 스친 "까치"를 가리켜 '안다'라고 단정하는 태도는 곧 시인이 응시하는 세계의 층위가 표면적인 그것이 아니라 그것 너머의 보이지 않는 지대에 해당함을 말해준다. 그것은 세계의 본질이라 할 수 있을 심층적 지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여기에는 "까치"만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까치"를 둘러싼 시공간의 관계망 속의 모든 존재들이 공존하고 있다. 지금 내 눈앞의 "까치"는 단지 현재에만 귀속된 "까치"가 아닌, 언젠가 '나'와 만났던 적이 있고 그 "사이로 나비 날아다닌 적도 있"으며 "혼자된 산비둘기가 지나가던 적도 있"던, 온갖 빼곡한 연기의 그물망 속에 놓여 있는 "까치"다. 따라서 이들 간 '만남'의 흔적들은 지금은 없어 보이지만 "나비는 맴도는 동그라미와 길게 끄는 곡선을 지어놓"은 바 있고 "산비둘기는 오래 구구대며 지그재그 끈을 그어놓고 날아"갔을 정도로 분명한 것이다. 이는 이들의 종적蹤迹이 시간의 흐름과 함께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들을 엮는 인연의 끈으로 작용하여 관계의 총체적 그물망을 형성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그것은 "너와 나, 나와 그, 그와 그들, 그들과 나/너 사이"의 인연의 인드라망으로서 구축된다는 것이다. (p. 시 64-65/ 145-146) (김윤정/ 문학평론가, 강릉원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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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바람에 쓸리는 물방울은 바다로 간다』 에서/ 2023. 12. 5. <현대시학사> 펴냄

  * 안경원/ 1977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盆地』『오늘 부는 바람은』『검은 풍선 속에 도시가 들어있다』『팔월』『진흙이 말하는 것』『십자가 위에 장미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