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빛은 위로
권현형
빛의 총량이 운명의 총량이라고 말할 수 없다
보라가 고혹적인 것은
기다릴 줄 알기 때문일 거다
꽃집 주인은 보라색 꽃이 강하다고 했다
천천히 시든다고 했다
멀어져가던 너의 뒷모습을 잊을 수 없다
쓰나미에서 살아남은 피아노가 그렇듯
모든 것을 껴안고 있는 눈동자
어둠을 싫어하는 네가 어둠 속에서도 그리 빛나다니
잠 속의 통각은 바깥보다 아프다
가슴 한복판이 끌로 도려낸 듯 아려와 새벽에 눈을 떴다
청동 그릇에 새겨진 물고기처럼
해가 길어질 때를 기다려야 한다
천천히 시드는 색감의 운명을 사랑하고 싶다
여름꽃을 한 아름 안겨주고 너는
난생처음 보는 여행자처럼 오른쪽 등의
지도 무늬까지 지우며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더 진하고 더 어둡고 더 달콤한 여름꽃의
전조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거나 끝난다
-전문-
해설> 한 문장: "빛의 총량이 운명의 총량이라고 말할 수 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여름꽃'의 이야기가 시의 소재이다. 보랏빛 여름꽃은 빛을 받으며 자라났을 테다. 시인은 지금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중이다. 이미 필연적이고 누군가에게는 생의 전부일 사건을 부분적으로 부정하면서 시가 시작되는 것이다. 더구나 문장은 단정하고 단호하다. 독자들은 이 문장 뒤에서 뜻밖의 세계를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할 것이다. 기대를 초점화하고, 그 이후 시의 풍경들이 펼쳐진다는 점에서 첫 문장은 시의 창문이다. 어떤 풍경들인가 하면, '멀어져 가는 너의 뒷모습' '쓰나미의 피아노' '눈을 뜨는 새벽' '천천히 시드는 보라색'이 그것들이다. 이 풍경들이 '운명의 총량'과 관련될 것이다. 그래서 "~라고 말할 수 없다"라는 말은 운명의 애매함에 대한 호기심과 격정을 동시에 불러오는 힘을 가지고 있다. 권현형의 시는 이 힘이 일으키는 정서들의 율동 자체이다. '말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특별하지만 아직은 애매한 제안의 호기심을 역시 애매하지만 비밀스러운 정서로 직접 이어놓음으로써 독자들은 언어의 논리를 감성으로 감싸버리는 독특한 경험을 하게 된다. '빛과 운명'에 대한 언어는 인식을 위해 움직이는데 문득 인식 저 너머의 무엇인가가 있어서 독자를 끌어당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독자들을 저 애매한 비밀의 숲으로 당겨놓고 시의 말은 그만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여름꽃의 생태를 가리키기 위해서라면 '빛이 운명의 모든 것'이라고 쓰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이 일반성을 위해 사용되는 말은 그러나 독특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이미 정해져 있는 운명에 대한 또 다른 강조, 요컨대 대표하는 언어일 뿐이다. '빛이 여름꽃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말은 한 아름다운 식물의 삶의 방식을 대표하는 범례적 표현이다. (p. 시 26-27/ 론141-142) (박수연/ 문학평론가)
---------------------
* 시집 『아마도 빛은 위로』 에서/ 2023. 12. 12. <여우난골> 펴냄
* 권현형/ 강원 주문진 출생, 1995년 『시와시학』으로 등단, 시집 『중독성 슬픔』『밥이나 먹자, 꽃아』『포옹의 방식』등
'시집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전부는 밖에 있어서/ 정진혁 (0) | 2023.12.28 |
---|---|
빛 한 상자 외 1편/ 권현형 (0) | 2023.12.27 |
지나가는 사람들 외 1편/ 안경원 (0) | 2023.12.26 |
덧없다, 숨다, 생겨나다/ 안경원 (0) | 2023.12.26 |
아이들이 지나간다 외 1편/ 이재연 (0) | 2023.1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