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5605

오형엽_모티프, 구조화 원리···/ 흉凶으로 지울 수 있는···비트 1 : 신동옥

흉凶으로 지울 수 있는 모든 것  비트 1      신동옥    여자 아이들의 숨바꼭질 놀이  털이 무성한 목덜미를 가진 사냥감을 쫓는 강아지  엄마가 손 갈퀴로 파낸 들판을 말없이 질주하던 물소 떼  야전침상 아래서 아빠의 작전 수첩을 물고 달아나는 고양이  언덕 너머 바다에서 나온 말 없는 물고기  어딘가로 끝없이 뻗은 오솔길이 숨긴 깊고 아득한 참호들   숲에서 깃을 치며 나오는 발 없는 새떼······   한때 우리는 같은 상처의 다른 흉터를 응시했다.  출구가 없는 터널 속으로 들어가 그대로 주저앉고는  빠져나올 길을 영영 잃어버려서  거기다 집을 짓고 산다, 파국이라는 비밀 아지트 속에서  접선할 방법을 영영 잊어버려서   흉터는 신비한 담장이 되어 비트를 구획했다.  우리는 꼭꼭 숨어서 침묵..

근처 새-곤줄박이/ 유종인 

근처 새-곤줄박이      유종인  근처까지만 내려온다밤새 눈물범벅을 만든 사내를 만나러비구니가비구니를 버리려고 겨울 산길을 내려오다가산바람 소리를 듣는다사내가 기다리고 있는 읍내 다방으로 가려다허옇게 잎끝이 마른 산죽山竹 덤불에 웅크린 고라니의 말간 눈빛과 마주친다발목이 부러져 인가에도 기웃거리지 못하고인중이 갈라진 코를 벌름거리며 우는 고라니 때문에비구니는 코앞에 닥친 간이 정류장을 연신 바라만 본다이만하면 됐지, 이만하면 됐어마음에 솟는 붉은 정념을 짙은 회색의 승복으로 가린 그대여 사내는 공연히 차를 식히며 식어가는 차의 일생을 내려다보며자신에게 오고 있을 머리 깎은 애인의 발걸음을 센다  햇살이 비낀 다방 유리창에 날아가는 새 그림자 기척에머리 깎은 애인의 발걸음을 놓치고 얼마쯤 다시 센다이만하..

돌 앞으로/ 정영효

돌 앞으로      정영효    더 많은 땅을 갖고 싶어서 나는 돌밭을 가꾸었다   버려진 땅으로 일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돌을 가려내고 계속 돌을 치우면서   돌은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것, 드러나도 새로움이 없는 것, 한쪽에 버려두면 그냥 무더기가 되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어느새 높게 쌓인 돌 앞에서 이웃들은 소원을 빌기 시작했다 부르기 쉬운 이름을 붙여주며 하나의 장소를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전보다 많은 땅을 가지게 되었고 더 이상 가려낼 돌을 찾지 못했다 쌓인 돌의 주인은 내가 아니었으므로   땅이 줄 내일을 상상했다 작물을 심고 빛이 내리쬐는 계절을 기다리는 동안   이웃들은 여전히 돌 앞으로 모였는데 땅에서는 무엇도 자라지 않았는데 지금을 밀어내는 소식처럼   하나의 장소가 필요..

김정현_순수한 분노의 잔여적 미래(발췌)/ 신의 미래▼ : 최백규

신의 미래▼      최백규    이제 네가 신이 되었어   사랑하는 사람들이 바닥에 눕혀진 나를 내려다보며 전해주었다   나무로 되어 조용히 망가진 교실에서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서럽게 울면서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죽으면 다 끝이라고 반복했다   열린 창을 통해 온몸에 빛이 쏟아지고 손바닥으로 눈가를 쓸어내리듯 바람이 가벼웠다   신은 왜 나에게 신을 주었을까   바다에서 썩지 못하고 다시 밀려온 소년을 바닷가에서 수습하듯이   여름 내내 살의와 선한 마음들이 세계를 둘러싸고 일상을 회복하기 위해 긴 싸움이 이어졌던 것이다   나의 몸 위로 수많은 꽃이 쌓이고   환하게 웃으며 사랑하는 사람들을 안아주고 싶었다  미래를 마주하고 온 것처럼  살가운 눈물로   더 이상 막아야 할 슬픔..

종일/ 권민경

종일     권민경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에 대해  생각하다 멈췄다   너는 지물포 집 사내아이  2학년 4반  맨 앞에 앉아 있고  피부가 검다   너를 더듬고  빚어보다  멈췄다   멈출 수밖에 없는  날씨들이 흘러간다 흘러   둑을 터뜨리고 마을을 집어삼킨다  똥물에서 헤엄쳐 피난 가거나  옥상에서 수건을 흔들 때  우리는 수재민이라 불린다   그거 어쩐지 사람 이름 같아  킬킬거리다 하늘이 밝아온다  뉴스 속보는 흘러가는데   영원히 아홉 살에 멈춰 있는   너의 죽음을 검색하면  고양군이 나온다  고양군은 고양군으로 멈춰져 있다  고양시가 나타나도 소용없는 일   야산은 어느 산의 이름일까  동명이인은 왜 이렇게 많을까  수재민의 아이들도  수재민  아이들이 구호품으로..

창문의 일상/ 김영

창문의 일상      김영    네모난 바깥이  안으로 들어온다.  반듯한 도형이지만 비스듬한 오후가  깃을 들이기도 한다  서쪽의 기울기라고 하지만  동쪽에게 배운 것 같다.   지구 밖에 존재하는 각도와 도형들엔  사람이라는 주인이 있다.  측량기사들이 빨간 말뚝을 꽝꽝 박아놓은  넓이와 도형에는 새 주인이 생긴다.  아무리 지구가 돌고 또 돌면서 뒤섞으려 해도  도형들의 주인은 확고하다.   사각을 삼십 도의 각도로 접으면 지붕이 된다.  지붕 밑은 어떤 곳인가?  올려다보는 일로 부끄러우면 지붕을 얹고  들여다보는 일로 부끄러우면 커튼을 친다.  또 대부분 사람은 벽을 세우는 일에 열심이다  자신의 벽 안에 자신만의 하늘을 들여놓고  눈 속엔 엿보는 일을 숨겨놓고 있다.   하루가 들렀다 가지 않..

밤의 해변은 끝없이▼/ 오정국

밤의 해변은 끝없이▼      오정국    멀어지면서 저무는 뒷모습  밤의 해변은  멀거나 가깝고   수평선에 넋을 놓다가 파도 한 줄  노을빛으로 울먹이다가 파도 한 움큼  새벽 바다 어선의 불빛에게도 파도 한 자락   밀려오고 쓸려가는 무한반복의 굴굽이가  무너지고 멈춰 설 때  비로소 홀로임을 깨닫는 모래알들   제본되지 않는 모래의 책이 사방에 널려 있다  닭 뼈다귀 개뼈다귀 사람 뼈다귀가 굴러다닌다  텅 빈 모래밭에서  희고 검은 돌멩이의 시계판 위에서  발끝에서 물밑에서   물결은 겹쳐져서 출렁이지만  제각각의 찰나 속으로 사라진다   폭죽이 솟는다 허공에서 꽃피는 불꽃의 아우성  캄캄하게 메아리치는 겹겹의 구멍들  저 상처를 어찌하랴 싶지만  밤의 해변은  끝없이   널빤지와 신발짝과 폐타이..

슬픈 아일랜드 15/ 강성철

슬픈 아일랜드 15         맬서스의 『인구론』에서 본 슬픈 아일랜드    강성철    맬서스가 "생산은 산술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반면,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라고 투키디테스 면전에서 인구론을 펼치자, 고뇌에 찬 아테네 새마을운동의 선구자이며, 아테네 제1시민인 페리클레스가 "아들, 딸 구별 없이 둘만 낳아 잘 기르자"라고 응수하였다. 이에 스파르타가 용맹한 전사를 배출하기 위한 남아선호사상에 배척된다며, 여성 전사 아마조네스를 몰아내고 오물 풍선과는 별도로 "인구는 산술급수적으로, 생산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라는 해괴한 전단을 아테네로 살포하였다. 이에 더해 중국의 저우언라이는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국공國共 내전 중지와 항일연합전선을 촉구하면서, 강력한 생산 장려책으로 맬서스의 인구론에 ..

별나라시인협회/ 윤효

별나라시인협회      윤효    2023년 10월 10일  김남조 시인 입국했을 때  별나라 시인협회 주최 환영식이 열렸다.  이어령 문학평론가의 사회 속에  유치환 회장의 환영사와  서정주, 조병화, 구상 시인의 축사가 이어졌다.  별나라 생활 안내는 정한모 시인이 맡았다.  좌중은 이미 만석이었다.  앞자리에는 특별 손님 김세중 조각가가 앉았다.  그 뒤에 나란히 청록파가 앉고, 그 옆으론 신석초, 장만영, 김현승, 김종길 시인 등이 보였다.  김춘수 시인은 연신 훌쩍이는 박용래 시인을 달래느라 시달리고  있었다.  풍류도인 박희진 시인은 물 만난 고기였다.  몇 달 먼저 왔다고 오탁번, 박제천 두 시인은 벌써 적응을 마친 듯했다.  다만 김종삼 시인은 걸어오느라 조금 늦고 있었다.   주인공은 식..

신동옥_메시지 없음(발췌)/ 격자 창문 안쪽에 무엇이 있으면 좋을까 : 권현형

격자 창문 안쪽에 무엇이 있으면 좋을까      권현형    내가 기른 비, 내가 기른 햇볕  달콤한 야생 열매가 잔뜩 들어 있길 바란다  격자 창문 안쪽에는 죽은 액자나 말린 꽃에 대한  에칭보다는 한 그루 나무가 서 있길 바란다   단것이 필요한 날에는  햇볕을 따라 걷는 게 좋다  올리브나무를 화분에 기르고 있는 마카롱 가게 앞을  지나다니는 게 유일한 행복인 날도 있다  올리브나무와 마카롱 가게가 앱 지도에  좌표로 있다면 잠시 행복 비슷한 상태가 될 수 있다   마카롱 가게의 낡은 소파를 흰 옥양목 천으로  덮어씌운 순간 흰색이라고 믿는 사람도 있다  흰색 천 커버는 낡은 삶을 뒤집어씌울 때도 있고  죽음을 덮어씌울 때도 있다  행복을 망상하며 햇볕을 따라 걸어 본다   막다른 구석, 막다른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