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5605

김밝은_미루나무가 바람에 몸을 맡기는 집(부분)/ 내 안의 절집 : 홍신선

내 안의 절집      홍신선    이 가을 찬비에 온몸 쫄딱 젖은 늙은 고양이가  절집 처마 끝에 은신해 그 비를 긋고 있다.   명부전 뒤 으늑한 땅이 생판 모를  한 포기 민들레를 가부좌 튼 무릎 위에 앉히고  서로 체온을 나누며 서로의 온기로 시간을 말리며  화엄 하나 이룬 것을  또 그 옆에는 고목이 고색창연한 제 슬하를 비워  담쟁이덩굴 두어 가닥 거둬 양육하는 것을   내 안의 어딘가 그런 절집 하나 찬바람머리 부슬비 속 그런 그린 듯 앉았다.  이건 내 세월도 아닌데 적막을 착취하는 이 비는 언제 그칠 것인가  속울음 삼킨 고양이마냥.     -전문-   ▶미루나무가 바람에 몸을 맡기는 집/ 홍신선 시인의 '오류헌五柳軒' (부분)_김밝은/ 시인  대문 앞에 '운보 문학의 집'이라 새겨진 표..

김밝은_말이 없는 산처럼 고요롭게 평화롭게(부분)/ 바위 하나 안고 : 오세영

바위 하나 안고      오세영    홀로 어찌 사느냐고요.  바위 하나 안고 삽니다.  집도 절도 아닌, 하늘도 땅도 아닌······  고갯마루 저 푸른 당솔 밑  웅크리고 앉아 있는  바위 하나 안고 삽니다.  바위가 그의 품에 한 그루의 난을 기르듯  말씀 하나 기르고  바위가 그의 가슴에 금을 새기듯  이름 하나 새기고  바위 하나 안고 물소리를 듣습니다.  집도 절도 아닌  미륵도 부처도 아닌······       -전문, 『77편, 그 사랑의 시』 (황금, 2023)    ▶ 말이 없는 산처럼 고요롭고 평화롭게/ 오세영 시인의 '농산재聾山齋' (부분)_김밝은/ 시인  선생님 댁은 서울에서 자동차로 2시간이 넘게 달려서야 닿는 안성시 금광면. 아직 봄이라고 불러야 할 5월인데도 일찍 찾아온 무더..

그해 오늘/ 고영민

그해 오늘     고영민    오랜만에 만나 함께 점심을 먹고  체한 듯 속이 더부룩하다고 하여  약국에 들러 소화제를 사 먹이고  도산공원을 걸었다  그해 오늘 저녁 그녀는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깨어나지 못했다   그해 오늘  나는 또 그녀를 만나 점심을 먹고  커피를 손에 들고 도산공원을 걷는다  팔을 벌려 오늘의 냄새를 껴안는다   납골당에 다녀온 조카가 단톡방에  사진을 올렸다    1주기야,  크고 뚱뚱한 엄마가  어떻게 저 작은 항아리 속에 들어간 걸까 ㅎ   동의 없이 무언가를 빼앗긴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해 오늘  삼풍백화점이 붕괴되었다  갈라파고스 땅거북의 마지막 개체인  '외로운 조지(Lonesome George)'가 죽었고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은 수영으로  대한해협을 건넜다  ..

삼덕동/ 이인원

삼덕동      이인원    아마 어느 초여름 저녁 무렵이었을 것이다   시멘트 바른 마당에 온 가족이 모여 있었는데 목이 늘어진 러닝셔츠 차림의 엄마는 살강에 남은 밥을 올려두고 수돗가에선 큰언니가 설거지를 막 마친 참이었다 여동생 둘이서는 공깃돌 놀이를 하고 나는 평상 한쪽 끝에 반쯤 누워 있었는데 마침 그때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고 빨랫줄에 널린 옷가지들이 이리저리 가볍게 흔들렸다   왜 유독 그 그림인지 알 수 없는, 자기부상 열차처럼 기억의 철길에서 살짝 떠오르는 한 장면이 있다 손바닥을 벗어나 다시 손바닥으로 안착하는 반질반질한 공깃돌에 숨겨졌을지도 모를 이미 예정된 궤도, 혹시 그날 신비한 磁性에 이끌려 마당을 슬쩍 빠져나온 내가 지금의 나를 한참 지켜보다 갔던 것일까   가끔 살강에 올려 둔..

한하운 송(頌)/ 임동확

한하운 송頌     임동확    단지 음력 삼월이면 진달래 피는 북위 사십 도의 고향, 함경남도 함주군 동천면 쌍봉리가 가깝다는 이유로 택한 김포 공원묘지 한구석  결코 그 누구와도 나눠 가질 수 없는 기나긴 슬픔과 고통의 봉분 속에 영원한 난민難民 한하운이 누워있다  아무래도 납득이 안 되는 날벼락 같은 운명을 잠시라도 잊고자 음독飮毒하듯 독주를 마시며 흘리며  젊은 날 북경, 산해관, 몽고사막, 무주, 양자강, 상해, 남경, 소주, 요동, 발해, 대련, 여순 등을 다리지 않고 떠돌던 한 국외자가,  죽어서도 이루지 못할 첫사랑 같은 유월의 뙤약볕 아래 독한 향기의 유도화 분홍빛 울음을 토하고 있다.  그렇게나마 귀향을 꿈꾸는 최후의 안식처마저 점차 좁혀오는 아파트 단지의 따가운 눈총 아래  성한 이들..

저글링Juggling처럼/ 박재화

저글링Juggling처럼      박재화    안절부절못하는 소년을 바라보며, 고창증* 걸린 황소의 눈망울이 그렁그렁하다   가발 쓴 아이에게 자전거타기 가르치는 젊은 아버지, 안간힘으로 햇살 감기는 뒷바퀴를 잡아당긴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꿈이여** 누가 입대라도 하는지 가로등이 골목을 그러안고 끔벅거린다   저 함박꽃 언제 화엄세계를 이루었나 엊그제도 가지 끝에 찬바람만 비틀댔는데   시드볼트***에선 언젠가인지 모를 언젠가를 기다리며 거처 잃은 씨앗들이 가면假眠의 밤을 보내고 있다   죽음이 일상이고 삶은 비정상이라고 TV에서 안경을 손에 쥔 법의학자가 일갈하는 밤   그래 이제 다시 시작이다 이 한 몸 안길 수 있는 곳이라면 그 깊은 속으로 무장무장 걸어 들어가는 거다 새벽이 새떼를 ..

시(詩)후기/ 김경수

詩후기     김경수    어설픈 꽃이며 싱거운 눈물이며 뜨뜻미지근 사랑이었던   나의 시를 땅속에 묻어버릴까도 했다  그날은 비가 내렸고 앞산에는 비안개마저 흐린 시야를  더욱 어둡게 했으며  서러운 알몸은, 흩뿌린 청강수 눈물에 점점이 녹아들고  아픔이 왔다  혼돈의 시대에 혼돈할 수 없음의 죄의 대가로  살과 뼈를 녹이는 아픔은 황홀, 그것이었다  양귀비 꽃대에 얼굴을 묻었다  꿋꿋하게  버림받은 살과 뼈가 용해되어 한 치의 공간도 차지할 수 없을 때,  확인하라,  땅속으로 스며든 내 살과 뼈가 최초의 자양분으로 버려진 씨앗을 싹 틔움을   새롭게 부여된 공간을 거느리고 메아리진 상두꾼 요령 소리에 귀 기울임을     -전문(p. 48)  ---------------------- * 『미네르바』 ..

조성환_「김지하의 초기사상」 中/ 밥이 하늘입니다 : 김지하

밥이 하늘입니다     김지하(1941-2022, 81세)    밥이 하늘입니다  하늘을 혼자 못 가지듯이  밥은 서로 나눠먹는 것   밥이 하늘입니다  하늘의 별을 함께 보듯이  밥은 여럿이 갈라 먹는 것   밥이 하늘입니다  밥이 입으로 들어갈 때에  하늘을 몸속에 모시는 것   밥이 하늘입니다.  아아 밥은  모두 서로 나눠 먹는 것17)     -전문-   ▶김지하의 초기사상/   '신과 혁명의 통일'을 중심으로(발췌)_조성환/ 원광대학교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여기에서 김지하는 밥에 대해서 두 가지를 말하고 있다. 하나는 "밥은 나눠 먹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밥을 먹는 것은 하늘을 영접하는 것(몸속에 모시는 것)"이라는 것이다. "밥은 나눠 먹어야 한다"는 것은 동학 도인들인 서로..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61/ 정숙자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61      정숙자    나비가 다시 알을 낳는다는 건 얼마나 참혹한 일인지요. 나비가 되기까지는 기지 않으면 안 될 단애가 기다리고 있는 까닭입니다. ···날개는 아마도 눈물의 흔적일 것입니다. ···왜 꼭 애벌레 속에 숨겨진 것일ᄁᆞ요. 신의 선물인 새 옷을 펴보기도 전에 부리에 먹혀버린 여한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그 수자령 나비들이 저에게는 가장 안 잊히는 ᄂᆞ비입니다. (1991. 1. 3.)                        거실 한가득 햇빛이 쏟아집니다. 난리라도 난 듯 구석구석 스며듭니다. 얼마나 고마운지, (자신에게 말 건넵니다) 우리는 우리가 만든 빛 조금만 써도 세를 내야만 ᄒᆞ죠. 꼼짝없이 계산해야 합니다. 태양의 덕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음입니다.  ..

복 비가 내리고 있네요/ 태동철

복 비가 내리고 있네요     태동철    자연은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절대 평등하다지요  자연은 어떤 경우에도 절대 용서가 없다지요  인간, 우리네 삶이 자연이라네요   우리네 삶은 그릇 따라 다르다지요  항아리 옹기, 사발, 종기, 접시  복 비는 그릇 따라 담긴다지요   아 차, 저 항아리 엎어졌네요  에 그, 저 사발 깨졌네요  어 쩜, 저 종기 쓰러지고 있네요  복 비는 옹기에만 찰랑찰랑 넘실대네요   복 비에 목마른 사람은  이노모리 가이츠* 선생님께  여쭈어 보시구려.     -전문(p. 24-25)    * 이노모리 가이츠 : "카르마 경영" 저자이며 경영자    -----------------------  * 『문학 사학 철학』 2024-가을(78)호 에서  * 태동철/ 경기 인천 출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