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5605

카론의 강/ 이봉주

카론의 강 이봉주 의사가 아버지의 임종을 예고한다 내 마지막 인사가 아버지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꿈결인 듯 어디선가 들리는 아버지의 화통 같은 목소리 어이 뱃사공 어이 뱃사공 술이 거나하게 취하신 아버지가 나룻배 터에서 강 건너 사공을 부르고 있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로 흐르는 한 줄기 강물 내 아픈 기억은 저 강물 속으로 바위로 가라앉고 있는데 아버지는 어떤 기억이 저 눈물을 흐르게 했을까 기억은 아플수록 더 깊은 곳으로 흐르는 것인지 내가 백 년을 엎드려 울어도 닿을 수 없는 깊고 깊은 강물 그 강물 위에 카론의 삿대가 어둠을 가르며 건너오고 있다 -전문(p. 178) ----------------- * 시 계간 『상징학 연구소』 2024-봄(13)호 에서 * 이봉주/ 2014년 신인상 & 2016년 ..

그렇게 지나가는 낮과 밤/ 송재학

그렇게 지나가는 낮과 밤 송재학 산행 중에 길이 사라졌다 나를 삼키고 안개는 내 생각처럼 주위를 맴돌았다 소리가 소리를 따라가며 실타래처럼 뒤엉키는 물소리 바람 소리 돌 구르는 소리, 정작 멱살을 움켜쥐는 건 정적이다 내 손을 붙잡는 흰 손인지 갸름한 손인지 무섬증은 갈대의 하늘거리는 줄기와 닮았다 독백처럼 발을 헛디디자 이건 생의 누락이라는 느낌이 다가온다 산인지 무엇인지 내 앞에서 자전하고 있는 거야 나의 행방불명 앞에서 불행이라는 실루엣이 곳곳에 있는 거지, 슬며시 좁은 길이 나왔다 처음 안개를 만난 곳, 떨어지는 체온 때문에 서걱대는 조릿대가 부산하게 움직였다 나뭇가지가 여기저기 마구 뻗어 있다 바로 옆의 낭떠러지는 비명을 높이만큼 새긴다 내 그림자부터 무덤인가 의심했다 시간이 지나서 잊을 수있는..

해안/ 박용하

해안 박용하 파도에 시체가 떠밀려온다 강물에 시체가 떠내려온다 내가 사는 마을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다 내가 사는 나라와 나라 밖에서 일어난 일이고 일어나고 있는 일이며 일어날 일이다 파도는 파도를 밀고 밀려 나아가고 파도는 파도에 밀리고 밀리면서 마침내 크게 한숨을 몰아쉬며 폐부를 해체하듯 백사장으로 쓰러진다 거기서 멀지 않은 해안 절벽으로 파도는 대가리를 산산조각내고 다시 바다에 합류한다 파도는 부서지고 깨져도 파도고 그러거나 말거나 바다는 평정의 바다고 내가 사는 나라 밖에서는 상상 이상의 시체가 떠내려가고 떠밀려온다 내가 사는 나라라고 별다를까 세계가 죽음의 파도로 연결돼 있다 -전문(p. 69) * 블로그註: 외국 지면에 소개된 대역본은 책에서 일독 要 ----------------- * 시 계간..

온통 비라서/ 강재남

온통 비라서 강재남 어쩌다 이렇게 만났을까요 부질없는 것은 늘 부질없는 것이 되버려요 너를 가늠하는 밤엔 꽃나무가 생겨났죠 흩어지다가 모양을 바꾸다가 사라진 후 묵념하는 방법을 아는 것처럼 꽃나무가 울어요 질긴 질감을 가진 울음이 지나면 우리는 사라지는 것을 생각해요 잠시 왔다 간다거나 꽃나무를 떡갈나무로 부른다거나 조금씩 넓어지는 우산이 되어 어둠에 누워 흘러간 생을 만져요 이런 일이 너의 속성이라면 그날 복화술사의 휘파람은 온통 네 것이었겠군요 어둠은 민낯으로 세상을 살았고요 너는 촘촘한 이야기를 남겼겠어요 오래 참아서 낡아버린 마음과 누대를 거쳐 허물어지는 마음과 끝까지 가보지 못한 마음과 부지런히 잊어야 하는 마음 어떤 곳에도 머물지 못하는 마음이 최선을 다해 투명해져요 뜨거운 너는 내가 되기도 ..

한상훈_시공간의 꽃 이미지 탐색(발췌)/ 벚꽃 나무 아래서 사과하다 : 김경미

벚꽃 나무 아래서 사과하다 김경미 활짝 핀 꽃 그늘 밑을 지나가다 문득 생각했지요. 내가 망쳤구나. 그의 이십대를··· 이토록 젊고 눈부실 그 사람 인생의 봄을 갑작스런 이별통보로 내가 엉망을 만들었구나. 다시 돌아올 수 없을 그 젊음. 그 화창한 시간을 내가 그랬구나. 문득 생각했지요. 하지만 그때의 갑작스런 마음이 변화도 어쩔 수가 없었으니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다고 변명하면서 봄꽃 활짝 핀 그늘 밑에 잠시 멈춰서서 미안했다 진심으로 사과합니다. 그 사과 전하려 직접 만날 생각은 영원히 없지만 그 사람 어느 날 활짝 핀 벚꽃 아래를 지나다 날 떠올리지 않고도 그냥 뭔갈 다 용서하는 기분이 되길 옛일 따윈 잊고 지금 참으로 단란하고 행복하게 지내길 활짝 핀 청춘의 벚꽃 나무 아래를 지나며 그렇게 내 진..

한상훈_시공간의 꽃 이미지 탐색(발췌)/ 산벚꽃 나타날 때 : 황동규

中 산벚꽃 나타날 때 황동규 물오른 참나무 사이사이로 산벚꽃 나타날 때 더도 말고 전라북도 진안군 한 자락을 한나절 걷는다면 이 지상살이 원願 반쯤 푼 것으로 삼으리. 장수 물과 무주 물이 흘러와 소리 죽이며 서로 몸을 섞는 죽도 근처 아니면 조금 아래 댐의 키가 조금씩 불어나고 있는 용담 근처. 알맞게 데워진 공기 속에 새들이 몸 떨며 날고 길가엔 조팝꽃 하얀 정情 뿜어댈 때 그 건너 색깔 딱히 부르기 힘든 물오른 참나무들 사이사이 구름보다 더 하늘 구름 산벚꽃 구름! 그 찬란한 구름장들 여기저기 걸어놓고 그 휘장들을 들치고 한번 안으로 들어간다면. -전문- ▶시공간의 꽃 이미지 탐색 벚꽃(발췌) _한상훈/ 문학평론가 「진달래꽃」의 '영변에 약산'을 비롯해서 구체적 지명을 통해 향토적 분위기를 보여주는..

순간의 집/ 김영

순간의 집 김영 결집이라곤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바람의 그물코가 보인다 휘몰아치는 허공을 상량으로 올렸으니 이 집의 상량문上樑文엔 무너지는 비법이 담겨 있겠다 싱싱하거나 푸른 날것은 치즈 나이프의 절삭력을 닮은 모래 능선을 조심해야 한다 오늘의 메뉴는 치밀했던 오류 한 점 엄밀하게 재료를 가감하는 모래 주방에서는 어떤 요리도 겹꽃으로 피지 않는다 후식으로 커피 한 잔을 받아들고 종다리 울음소리를 넣어 휘저으면 귓바퀴가 구름에 닿는다 번뇌가 없는 뭉게구름은 속도도 없어 한 점 그늘이 귓등에 오래 정박한다 채근은 머리카락의 일 바람은 모래를 베고 꽃잠에 들었고 그늘의 옆구리를 찢고 발아하는 아지랑이는 첫걸음을 놓친다 길이라 고집했던 모든 길들이 다 지워지고 위쪽은 오로지 구름이고 아래쪽은 푹푹 ..

타이탄/ 이재영

타이탄 이재영 얼마 전 단 한 번도 바다에 가지 못한 사람을 만났다 그는 바다를 분필로 벽에 그려 나에게 보여 줬다 바다는 네모난 박스였다 그 안에 아이도 노인도 들어가 있고 물고기도 들어가 있고 별도 있고 태양도 있고 염소도 있고 텔레비전과 수도꼭지도 있었다 바다에는 도로가 나 있고 그곳으로 자동차와 말과 탱크가 있었다 이것이 당신이 생각하는 바다인가요라고 묻자 그는 바다를 한 번도 본 적 없어서 그냥 그리고 싶은 것을 그렸다고 대답했다 바다는 항상 입을 벌리고 있다 커다란 몸을 갖고 있어서 먹는 것도 많다 밤마다 태양도 먹고 아침마다 다이버들도 먹는다 바다에 능숙한 동물들은 해변으로 올라와 바다에 삼켜지지 않지만 삼켜진 것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하나같이 말이 없다 나는 무척 기쁘거나 무척 환상적이어..

유언/ 김제이

유언 김제이 나는 입을 열지 않는 이를 만난 일이 있다. 그는 필연을 깨는 평온한 세상으로 떠나겠다 선언하고는 허연 입술 사이 캄캄한 입속으로 담담히 걸어 들어갔다 기꺼이 삼켜지는 것들은 철저히 불태우는 것이 그가 떠난 잇속의 법칙이었다. 입이 바쁜 사람들은 그의 입속에 든 것을 맞추겠다 질긴 토론의 장을 열었으나 그의 입은 열리는 법이 없었고 그 시뻘건 골 속엔 식은 단어들만이 자유로이 떠돌다 꿀꺽 삼켜졌다 삼켜진 것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명백한 불가사의가 되었다 투명한 단백질의 진물이 이 사이로 새어 나오도록 지치지도 않고 요란하게 열고 닫히는 틀니의, 고기가 되어 입과 입으로, 그만 영영 살아남고 말았다 그의 유언장은 불태워졌다. 나는 입을 열지 않는 이를 만난 일이 없다. -전문(p. 30..

이찬_'문질빈빈' 또는 '백비'의 시학을 위하여(발췌)/ 사랑의 발명 : 이영광

사랑의 발명      이영광    살다가 살아 보다가 더는 못 살 것 같으면  아무도 없는 산비탈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누워 곡기를 끊겠다고 너는 말했지   나라도 곁에 없으면  당장 일어나 산으로 떠날 것처럼  두 손에 심장을 꺼내 쥔 사람처럼  취해 말했지   나는 너무 놀라 번개같이,  번개같이 사랑을 발명해야만 했네     -시집 『나무는 간다』(2013. 창비) 전문   ▶'文質彬彬' 또는 '백비白賁'의 시학을 위하여(발췌) _이찬/ 문학평론가  「사랑의 발명」이 명작의 반열에 오를 수밖에 없는 까닭은, 어마어마한 상상력의 크기와 그것이 수반하는 광대무변한 내용의 '자기 함량 운동'에서 선득한 느낌으로 휘감아 오듯, 이 시는 이영광의 다른 "사랑" 시편들이 보여 주는 생동하는 현장감을 고스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