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5605

겨울 눈밭을 걸으며/ 이진서

겨울 눈밭을 걸으며 이진서 나는 언제나 연소된 마음들을 상상한다 눈이 가득 내리는 겨울, 창문에 신문지를 붙일 때 팔팔 끓는 찻주전자를 옮기다가 손을 데었을 때 너와 눈을 밟으며 한 이야기는 미드나이트 클래식 겨울이 끝나갈 때쯤이면 내 마음 속에 늘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사라진 것들을 기억하는 게 제일 어렵다 잊혀진 감정들을 재조립할 때는 꼭 네 몫의 마음을 남겨두고 싶었다 그러니까 마음 속 눈을 퍼낼 때에는 언제나 과분한 사랑을 상상할 것 어디를 가더라도 언제나 네 곁이다 지겹고도 익숙한 마음들 차가운 공기를 얼굴로 맞으면 신발 위로 눈 결정들이 쌓인다 사각사각하고 간질간질한 사랑의 현현 -전문(p. 176-177) ---------------- * 『시마詩魔』 2023-여름(16)호 에서 * 이진서/..

누구의 시선일까/ 조우희

누구의 시선일까 조우희 어두워도 느껴지는 어색한 시선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는 또 다른 눈 그러나 어딘가에도 없는 눈 사람의 자취가 없는 이곳 뒤에는 숨겨진 내가 있지 누구도 모르게 스며드는 그것 희미하게 들리는 건 비명인 것 같기도 도돌이표 노래인 것 같기도 한 그것 달팽이관이 돌아가기 시작한다 숨을 멎다가 쉬다가 어쩌면 내가 아닌 것이 숨을 쉬는 것인지도 모를 이상하고 기이한 현상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발소리가 들리지 않게 내 옆에 서 있는 사람이 있다 형체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커졌다가 작아졌다가 빠르게 다가오는 누군가의 발소리 이리저리 유연하게 움직이는 것이 뼈 없는 풍선사람 같다 누구일까? 의문이 의문을 낳지만 생각은 이미 엉킨 상태 봄을 반기듯 꼬인 매듭을 풀 듯 생각을 하니 하나씩 풀어내..

눈물/ 박시연

눈물 박시연 벽난로에서 장작불 타는 소리가 들린다 오묘한 분위기와 비스듬한 그림자 엄숙한 숨소리에 입김을 내뱉는다 물에 비치는 내 모습 가위로 오린 듯한 이목구비 습관처럼 네 생각이 난다 생각을 비틀어 버린다 고통이 부서진다 심장 박동이 멈추고 이명이 들린 날 일기장 곳곳에 네 이야기가 적혀있고 은하의 눈물을 닦아준다 은하에는 신비한 심리가 생겨난다는 걸 그리고 나는 무너지지 않을 그리움이 와르르 쏟아지는 걸 본다 -전문(p. 166-167) ---------------- * 『시마詩魔』 2023-여름(16)호 에서 * 박시연/ 통영중학교 1학년

금시아_물 안팎의 시공간을 부유하는 안개 讀畵(발췌)/ 춘천역 : 신동호

춘천역      신동호    노을이 비껴 앉아 있었다 거기에선  무료한 사람들의 세월이  떠나지도 도착하지도 않은 채 안개 속에 잠겨 있었다  뭔가  내 청춘의 십 년은 내내  안개로부터 벗어나려는 발버둥이 아니었던가  문득 옛 친구의 낯익은 얼굴을 만나고 돌아서면  비로소 기억 저편에 놓이던 추억  내내 앞만 보며 달리던 동안에도  묵묵히 세월과 더불어 낡아지던 풍경들  그 오랜 것들은 아름답던가 추억은  아련하다 새벽거리를 쓸던 이웃들의 얼굴도  나는, 머리를 쓰다듬던 그들의 손길로 자라지 않았던가  이내 마음속에서  혁명이란 이름으로 인해 소홀히 해서 안 되었을 것들  떠오른다 거기에선  홀로 돌아오는 어머니, 아들을 남겨두고  감옥 담장을 자꾸 되돌아보며 가슴 저미던 어머니  안개 속에 눈물 감추..

달팽이/ 이우디

달팽이 이우디 손끝마다 흐린 표정이 푸른 문고리를 흔든다 한 번도 열린 적 없지만 그곳은 내가 사라지는 지점 오색 종이로 오리고 붙인 오늘의 부담이 첫눈처럼 소복하다가 물결 한 몸으로 소곤대다가 안과 밖 경계에서 화려한 모드로 전환, 사라지는 중이다 손끝마다 적의를 품은 고요가 두꺼워진다 환호 한번 질러본 적 없지만 그곳은 열정의 데시벨이 제로가 되는 지점 태연히 남겨진 나 우스꽝스러운 안도에 드라마틱한 이마가 희게 웃는 나 이해 못 한 날 내내 앓다가 시늉만 하는 지문을 지나가는 중이다 채취된 나의 속도는 인 템포in tempo 붉은 갈채가 들려! -전문(p. 86-87) * 달팽이: 앙리 마티스 ---------------- * 『시마詩魔』 2023-여름(16)호 에서 * 이우디/ 2014년『시조시학..

한 아이의 꿈/ 김상미

한 아이의 꿈 김상미 한 아이가 죽은 쇠박새를 묻고 있었다 지나가던 나도 흙 한 줌 쥐어 덮어주었다 천국에도 분명 새가 있을 거예요 물론이지, 내일이면 저 쇠박새도 천국을 훨훨 날아다닐 거야 아이는 고개를 끄덕 뜨덕이며 쇠박새야, 이젠 천국으로 훨훨 날아가거라 그러곤 소맷부리로 눈물을 닦았다 나는 아이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주고는 걱정 마, 쇠박새는 꼭 천국으로 날아갈 거야 고마워요, 아이가 눈물 고인 미소로 꾸벅 인사를 했다 우리 쇠박새가 좋아하는 풀씨를 무덤 앞에 놓아줄까? 그래요, 그럼 쇠박새도 더 잘 날아갈 것 같아요 아이와 나는 근처 풀밭에서 씨 여문 풀꽃을 뜯어 쇠박새 무덤 앞에 놓아주었다 쇠박새는 들고양이에게 물려 죽었지만 천사 같은 아이를 만나 지상에 따뜻한 무덤 한 칸을 얻었다 그리고 ..

첫과 끝/ 이현호

첫과 끝 이현호 안녕, 내 어리고 오랜 사람 부서지지 않는 마음속에 사는 한 마리 소라게여 오늘 나는 기억의 장례를 치른다 반질반질하게 손때 묻은 기억을 버리고 늙고 낡은 혼자가 되어 뒤돌아선다 기억 속에 큰 집 한 채를 짓고 머물며 자라지 못해 늘 어리기만 하고 뽑아도 뽑아도 새로 돋는 새치처럼 되살아나서 언제나 가장 오래되었던 어리고 오랜 사람아, 안녕 백사장에 맨발로 서 있는 아이가 몰려오는 파도에 까르르 웃으며 뒷걸음질 치듯이 추억할 수 없었으니 성큼 바다에 뛰어들어 파도를 타는 사람같이 출렁일 수 없었으니 집게발같이 네 손을 꽉 잡고 가고 싶었던 미래 나는 오늘 자루를 잃어버린 미래의 망치로 화석처럼 단단해진 과거를 내리친다 안녕, 안녕히 그날 이후로 나는 네게 꼭 맞는 안식을 입고 그때까지 나..

이병국_빛의 질서보다 얼룩의 어둠 속으로(발췌)/ 비(緋) : 전형철

비緋 도플러 효과 전형철 잠깐 눈을 감았다 뜨면 매번 새로운 장면이 펼쳐진다 햇귀가 사각의 유리를 투과해 저서식물처럼 어룽거린다 그늘에 웅크리고 있던 공기는 숨은 해의 이동을 따라 경계를 천천히 박음질한다 기후의 표정을 읽는 것은 어제까지만 유효했다 빛은 발산하기 전 우주의 긴 터널을 통과하며 실선의 배후가 된다 그럴 때는 있던 것을 덜어내고 벽화로 가득 채운 무덤 양식을 떠올린다 초점이 흐려질 때까지 배후는 등이 떠밀린다 빛의 서문을 채색한다 우주 망원경에게 빨려든 성운들에게 가채를 하는 것은 가채를 얹는 불안과 같은 이치인지도 모른다 있는 색보다 더 많은 없는 색들로 가득 찬 우주에서 온 빛을 누군가는 해석해줘야 한다 우리가 볼 수 있거나 이름 부를 수 있게 돋아나는 싹은 이미 가을에 떨어질 곳을 점..

이현호_닻과 같은 사람/ 빗속의 블루마블 : 이혜미

빗속의 블루마블 이혜미 마주앉아 주사위를 던지던 밤, 우리는 비에 젖은 도시들을 하나둘 쓸어 모으기 시작했네 힘없이 손끝에서 녹아내리던 이국의 골목들, 온통 여관과 호텔뿐인 도시들 속에서 우리는 좀 더 비릿한 곳을 찾아 위조지폐처럼 떠돌았지 너에게로 떠난다는 것은 한 바퀴 돌아와 다시 제자리에 쓰러진다는 말, 도시의 행간에 몸을 누이면 성난 빌딩들이 서늘한 몸을 포개왔네 누군가 키운 파산을 먹고 자라나는 도시, 한 칸 그림자를 엎질러놓을 곳이 없어 우리는 흘러내리고 아무리 주사위를 던져도 도시는 내 것이 아니었어 도시의 이름들은 생에서 꼭 투병해야 할 병명일 뿐, 주사위의 수를 따라 앞다투어 자리를 바꾸던 별들이 유목의 좌표를 일러주었네 이 밤을 구르던 거대한 주사위가 돌아오는 소리가 들려 흐르는 비와 ..

오형엽_상징과 알레고리 사이, 신화와···(발췌)/ 사랑의 전문가 : 진은영

사랑의 전문가 진은영 나는 엉망이야 그렇지만 너는 사랑의 마법을 사랑했지. 나는 돌멩이의 일종이었는데 네가 건드리자 가장 연한 싹이 돋아났어. 너는 마법을 뿌리길 좋아해. 나는 식물의 일종이었는데 네가 부러뜨리자 새빨간 피가 땅 위로 하염없이 흘거갔어. 너의 마법을 확신한다. 나는 바다의 일종. 네가 흰 발가락을 담그자 기름처럼 타올랐어. 너는 사랑의 마법사. 그 방면의 전문가. 나는 기쁨의 일종이었는데, 오 나의 불타오를 준비, 나는 나를 사랑했었다. 폐유로 가득 찬 유조선이 부서지며 침몰할 때, 나는 슬픔과 망각을 섞지 못한다. 푸른 물과 기름처럼. 물 위를 떠돌며 영원히 -(전문), 시집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p. 27_ (문학과지성사. 2022) ▶상징과 알레고리 사이, 신화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