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5605

4시 20분/ 정선

4시 20분 정선 데면데면한 봄이 왔다 못 견디는 시간이 있다 지루했다 놀이터를 바꿨다 둥근 것은 부드러이 스며들었다 총탄 속에서도 염소 새끼가 태어났다 사람은 많은데 사람이 없었다 새벽 4시 20분 철로에는 다정한 고래가 살았다 아이들은 흰긴수염고래게임* 속으로 스며들었다 고래와 따뜻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팔목에 고래를 그려서라도 고래가 되고 싶었다 마치 바닷물을 빨아들여 물고기를 걸러 먹듯 흰긴수염고래는 아이들을 삼켰다 마침내 모두 고래가 되었다 새벽 4시 20분은 커다란 배가 가라앉기 전까지 발버둥 치는 시간 새벽 4시 20분은 불면인 내게 취약한 미필적 고혹의 시간 새벽 4시 20분을 베고 누웠다 수직으로 긴 숨을 내뿜는 하얀 고래의 길이 환했다 세상의 슬픈 목소리들은 사방에서 그치지 않았다 ..

티셔츠를 벗다가/ 이영옥

티셔츠를 벗다가 이영옥 목 좁은 티셔츠를 벗다가 셔츠에 갇혔다 셔츠는 아랫도리를 흔들며 먹이를 놓치지 않을 기세다 겨우 벗어 탁자에 던져둔 셔츠를 보니 탈피를 못해 죽은 뱀 같다 외피가 내피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으면 뱀은 죽고 말아 몸을 내보내지 못한 가죽은 조마조마했을 거야 뱀이 삶을 포기하려 했을 때 뱀보다 더 무서웠을 거야 허물을 벗다가 포기한 뱀은 자신이 죽을 자리를 찾아간다 산에서 어딘가로 기어가고 있는 뱀 허물을 보았다 너는 너로부터 잘 달아났구나! 눈물로 반성하며 허물을 벗고 다른 허물을 찾아가는 나여 아침에 벗은 허물이 저녁이면 귀신같이 몸을 찾는다 -전문(p. 107) ------------------- * 『시로여는세상』 2022-봄(81)호 에서 * 윤진화/ 2005년 ⟪동아일보⟫로 ..

서울역 7017, 휘파람을 부세요/ 윤진화

서울역 7017, 휘파람을 부세요 윤진화 의정부 이모가 죽었다. 무당은 신이 자기를 버릴까 봐 또 다른 신을 찾아다녔다. 제일 오래된 신의 끈을 세게 묶고 산책을 했다. 피아노에 있어야 할 건반을 이가 빠진 노인이 들고 있었다. 르네상스식 서울역은 옛것이었다. 바로 옆에 낡은 신을 모아서 만든 슈즈 트리(shoes tree)가 있었다. 옛 서울역만큼이나 높게 쌓아 탑을 이뤘다. 사람들이 냄새나고 더러운 신들을 치워달라며 민원을 넣었다. 브람스의 교향곡 3번 3악장이 파도쳤다. 나는 선녀보살 이모처럼 휘파람을 불었다. 깊은 바다에서 자맥질을 끝내고서야 휘이익 숨비소리 내는 해녀처럼. 부채는 없었지만 바람은 적당히 불었다. 정수리로 전기가 찌리릿 올랐고, 온몸이 뜨거워서 신을 벗었다. 시원하고 친절한 신발가..

두 밤/ 이계열

두 밤 이계열 두 밤 자고 와 병중이신 아버지가 손가락 두 개를 쫙 펼치시며 하신 말씀이다 두 밤 자고 와 홀로 남은 어머니가 어깨를 들썩이며 하신 말씀이다 길 떠나기 전, 돌아오고 돌아오던 길이다 -전문(p. 97) ----------------- * 『시로여는세상』 2022-봄(81)호 에서 * 이계열/ 2003년『심상』으로 등단, 시집『이쪽이 저쪽을 아는 마음』『그 자리에 놓아두자』등

낙타의 문장/ 이학성

낙타의 문장 이학성 생각이 막힐 땐 낙타를 업고서 사막을 건넌다고 상상하지. 검푸른 하늘에 박힌 뭇별들을 거룩한 안내자 삼아 닷새째 나가고 있으나, 말문이 트이기 전까진 낙타를 내려놓지 않으리라 다짐하지. 꼬박 낙타를 떠메고서 사구를 넘자니 발목이 모래무덤에 빠지고, 위안을 구실로 단조로운 휘파람 소리를 내고 있지만, 업힌 낙타는 마치 몹쓸 병이라도 도진 것처럼 생기를 잃고 혼곤한 잠에 빠져 있어. 그러니 어서 마을로 낙타를 데려가야 해! 걸음을 멈추지 못하는 이유가 그래서라 상상을 서두르지. 아무리 병든 낙타라지만 순한 새끼양보다 가벼울 리 있을까. 대관절 낙타를 업는 게 말이 되냐며 누구든 나서서 뜯어말릴 만도 한데 아직 그러는 이는 없어. 온종일 걸어도 낙타가 무겁게 침묵하는 까닭과 일평생 떠맡아 ..

운명의 경사/ 함성호

운명의 경사 함성호 사람들이 안개비를 밀어내며 다리를 건너오고 있다 그처럼 꽃이 피었다 그 너머에 옥빛바다는 어딘가 기울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슬픔이 인간의 조건이라면 우리는 모두 운명의 경사에 놓인 기울어진 의자에 앉아 있을 것이다 시든 꽃들은 계절의 다음을 모르고 불을 켠 집어등들이 수평선을 지우고 있다 지난날 우리 둘이 즐거웠던 일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건 걱정과 근심으로 올라가는 계단이었어요*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공중의 솔개처럼, 뛰어오르는 숭어처럼 운명의 경사로, 배꽃 같은 파도가 밀려들어오는 하류로, 어떤 가난도 철없음을 이기지 못하리라는 것을 믿는다 수면 위로 드리운 팽나무 어지러운 가지에 사랑인지 증오인지 모르고 달려드는 물고기 떼 세상은 눈물로 된 바다를 휘저어 만들었대 인간이라는 장애..

주목받지 못해서 감사하다/ 차창룡

주목받지 못해서 감사하다 차창룡(동명) 유튜브를 시작했으나 봐주는 사람이 없다 야속하기도 했으나 생각해보니 감사하다 주목받는 사람은 얼마나 바쁜가 바쁘지 않아서 나는 날마다 아침을 먹고 나면 뒷산에 소풍 간다 경쟁 치열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침밥 먹고 뒷산에 소풍 가는 사람 몇이나 되나 그것도 매일 소나무가 꿩의 입을 빌려 부르는 노래 듣는 이 얼마나 되나 해당화가 피었다 지면서 살짝 눈을 흘길 뿐 마스크를 내리고 오던 사람이 나를 보더니 재빨리 마스크를 올릴 뿐 알아보는 이도 없고 말 걸어오는 이도 없어서일까 까치들이 동무하자고 가까이 온다 다람쥐가 나무둥치인 줄 알고 내 발 위로 지나간다 그렇게 하루가 심심하다 새소리가 청아하면 하늘에선 구름이 할 일이 없어진다 심심한 김에 참선이나 하자 주목받지 않..

밀림, 도시, 본능/ 최은묵

밀림, 도시, 본능 최은묵 사자는 죽을 때까지 사자, 들개는 죽을 때까지 들개, 물을 마실 때는 악어를 조심해, 합의된 구역이란 없다 떡볶이 골목, 막창 골목, 순대 골목, 사자는 바람을 등진 녀석을 찾지, 하이에나는 사자 주변을 맴돌고 물소 혼자 사자에게 덤비는 장면은 왜 매번 느린 재생일까요? 버림받은 당신의 봄처럼요 송곳니가 뱃가죽을 찢는다 땅에 떨어진 뿔은 무엇도 지키지 못한다 차례대로 배를 채우는 빌딩들 난 왜 뾰족한 이빨을 보면 흥분될까요? 건기는 악어가 사냥하기 좋을 때다 출입문에 점포임대를 붙여 놓고 누떼는 물아 찾아 떠났다 해 질 무렵 먹잇감을 노리는 들개 떼, 한쪽의 죽음은 다른 쪽의 미소 배부른 맹수의 눈을 본 적 있나요? 봄을 닮은, 아이는, 낳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물은 골목 깊은..

봉쇄수도원/ 김기형

봉쇄수도원 김기형 불을 끄는 사람이 많아요 혼자의 얼굴을 혼자 보는 사람이 앉아요 팔과 다리에 흰 연기가 피어올라요 밤새 불을 피웠습니다 종을 쳤습니다 뒷모습이 되려고 닦이지 않는 오늘의 빛이 되려고요 당신도 머리를 숙이고 있지 않나요 당신도 머리 없이 망토를 두르고 제 몸을 그리고 있지 않나요 당신이 공손하게 말합니다 제가 닦은 흰 접시 제가 만든 흰 우유 제가 지운 흰 눈동자 흰 기억 잊힌 것은 잘 개인 수건과 같습니다 바닥을 닦는 흰 바람 같습니다 순한 눈雪 같습니다 당신은 어지럽지 않나요 강보에 쌓여 울다보면 아이가 되지 않나요 우리는 가루가 되고 송곳이 되고 다리가 되고 기우뚱해지고 표정이 되고 아무 일이 없는 생각이 돼요 지금 막 흰 돌, 당신이 구워낸 당신에게 도착한 둥근 준비 그것 앞에서 ..

Who Iide, chicken?/ 김건영

Who lide, chicken? 김건영 누가 구라를 쳐, 겁쟁아 한국인은 모두 치킨을 좋아하지 치킨은 빨라 겁쟁이는 모두 빠르지 겁쟁이는 거짓말보다 빠르지 겁쟁이는 판단을 유보하지 우리 싸우지 말자, 라고 말하는 애는 선빵 치고 난 겁쟁이 반반이 좋아서 나라도 반반이야 나라도 그렇겠다 안전제일 반반은 안전하고 반반은 한쪽이 붉지 Who Ride, chicken! 겁쟁이를 타고 그는 나타난다 취향을 통일하라 통일이 새로운 독재라니 반반에다 투표하자 중립 만세 반반으로 반반한 사람들끼리 만나자 不信으로 대동단결! 내가 정의로우면 나머지는 모두 악당이 되는 거야 정의가 우리를 정의한다 정의당한 겁쟁이들 올라타라 살아남아야 도망칠 수 있다! 겁쟁이 타도 겁쟁이 타도 우리는 달린다 우리는 후달린다! 이봐 이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