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5605

박동억_생태적 아노미와 기후시·1(발췌)/ 눈을 뜰 수 있다면 : 박은지

눈을 뜰 수 있다면 박은지 활활 타오르는 불을 구경했다 저게 우리의 미래야 나는 거대한 캠프파이어 같다고 생각했지만 너의 눈동자를 오래 들여다보니 왠지 그런 것 같기도 했다 뜨겁고 빛나는 우리가 머물던 의자도 불타고 있을걸 의자 아래에선 잡초가 적당한 높이로 자라고 우리가 흘릴 아이스크림을 기대하며 발등을 오르던 개미 의자 옆에는 결말을 쌓아 만든 돌무더기가 있었다 돌무더기를 뒤덮은 나무 그림자도 뜨겁게 빛나고 있을까 밤새도록 타는 소리를 들었다 꿈에선 결말의 비밀이 불탔고 모든 이야기가 다시 끓기 시작했다 들끓는 꿈 새벽은 연기가 점령했다 아침 냄새와 저녁 냄새를 모두 불에 빼앗겼다 계곡을 따라 불이 사라진 자리를 걸었다 검은 하늘 아래 검은 재가 가득했다 모두 비슷한 색을 갖고 있었다 발이 묶인 것 ..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조용우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애 관한 시론*▼ 조용우 휴일 저녁 우리는 침대에 누워 앙리 베르그송의 책을 편다 베르그송 베르그송 그의 이름을 발음해 보라 여기 이 검은 활자를 보라 H.Bergson 이름만으로 모든 시간을 해명하는 이름들이 있다 베르그송베르그송 아무것도 해명할 필요가 없는 이름이다 그는 철학이다 지난 세기의 프랑스다 오늘날의 유로파다 그의 이름은 궤변의 뼈를 부러뜨린다 베르그송베르그송 이런 이름들은 시를 끊어내는 법이다 아 이토록 순수한 지속, 그의 과학적 견해는 그의 이름은 모든 열린 것을 닫는다 베르그송베르그송 그러는 동안 시인은 낮은 매트리스 위에 엎드려 잠들어 있다 시인은 우리 중 가장 깨어 있지 않은 자다 그렇다 그는 깨달음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잠든..

검은달/ 이서윤

검은달 이서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서 붉은 지장을 찍고 갱도로 들어서는 남자 탄가루가 굳은 폐를 착암기로 뚫으며 갱도 안으로 들어섰다. 탄가루 마시며 갱도 뚫던 남자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앉아 있다 지하의 열기 머금은 침목들이 헐떡일 때 익숙한 공포가 궤도를 따라 들어왔다 새파랗게 날 세운 공포가 어둠의 깃 한쪽을 허물어 궤도 위로 흩뿌렸다. 달빛처럼 차가운 정적에 걸터앉았던 궤도가 검붉게 녹이 슬었다. 부풀은 남자의 폐처럼 갱도 더듬는 착암기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릴 때 남자는 검게 부풀은 폐를 꺼내 컨베이어 벨트에 올려놓았다. 석탄처럼 굳어가는 남자의 폐가 조금씩 줄어오면 가쁜 숨 몰아쉬던 남자의 갱 속엔 검은 바람이 인다 -전문(p. 69) * 블로그 註 : "검은달" 띄어쓰기는 원문대로 옮겼음을 ..

귀화/ 배귀선

귀화 배귀선 기억에 묶인 저녁이 어슬렁거린다 반원이 만든 공간과 그 너머 마당을 끌고 사는 목줄은 얼마큼의 시간이 흘러야 벗을 수 있을까 앞발을 허공에 그어대며 당기는 지척 여기와 저기, 한 발짝도 목줄 없이는 내디딜 수 없는 짐승의 세월 기억을 길들이는 듯 허공을 짖는다 몸속 어딘가 웅크린 소식 없는 딸아이 같은 무거움이 메아리처럼 돌아오는 늦은 밤이면 나는 습관처럼 가장 빠르게 귀화를 서두른다 오늘은 또 허공을 향해 얼마나 짖어야 하나 -전문(p. 54-55) ------------------------ * 『현대시』 2023-7월(403)호 에서 * 배귀선/ 2011년 ⟪전라북도민일보⟫ 신춘문예 당선 & 2013년 『오늘의 문학』으로 등단

생을 사랑할 마지막 시간 ▼/ 오주리

생을 사랑할 마지막 시간▼ 오주리 내 생의 마지막 장章 세상과 작별 인사를 위해 남겨진 시간 비 오는 4월의 벚꽃길 사랑한다 말하면, 나도 봄빛 수채화의 풍경이 되면, 신은 죽음의 병 오던 걸음 멈추라 할까 생을 사랑하지 않은 죄로 죽음의 병 찾아와 당신의 섭리 깨쳤으니, 신이시여, 이젠 눈물 닦아주소서 나의 짧은 생, 태어나 내내 우울이라는 생명체의 연인이던 나의 흰손 끝에서 태어난 건 눈물의 시뿐 메마른 벚나무 가지, 꽃눈은 봄밤의 어둠에도 피어났건만, 나의 여체만은 스스로 목 조르듯 이 세상 아니라 죽음으로 피어나는 꽃 비바람에 벚꽃잎이 나비의 영혼처럼 유계幽界로 흩날린다 존재하자마자 사라지는 꽃잎들, 시들고 마를 새 없이 꽃의 운명이란 떨어지는 것이니, 봄비에 벚꽃의 순간은 영원도 하였다 목숨이란..

인증 샷/ 오정국

인증 샷 오정국 한 발짝도 생략하지 못했다 누가 내 눈을 가리고 데려온 건 아닌데, 문득 지금 여기다 멀리도 아니고 가깝지도 않게 딱 이만큼의 간격, 정면은 언제나 눈에 아프지만 숨을 데가 없다 누구든 제 발로 여기까지 왔다 어떤 얼굴은 꽃송이 같고, 그 곁은 종잇조각 같고, 뒤쪽은 페인트칠 벗겨진 문짝 같은데, 또 무엇을 증명해야 하는 건가 카메라 뒤편의 길이 우리가 깊어나갈 생이라면, 등 뒤의 배경은 살아온 내력이다 벚꽃 터널은 눈부셨고, 유적지 돌탑은 아름다웠다 오늘은 기념식 현수막이 펄럭거린다 이 순간만큼은 웃는 듯이 울고, 울면서 웃어야 한다 여태껏 발걸음 바깥을 살아보지 못했다 문득 고개를 쳐들면 날이 저물고, 긴장된 침묵들이 뿔뿔이 흩어질 때, 사진 찍고 남겨진 얼굴, 공중에 희뿌옇게 떠 있..

하늘이 아리다/ 김정현

하늘이 아리다 김정현 금 간 삶을 꿰매려 등골 하나둘 세다가 이내 힘없이 풀어졌다 고향인 양 뿌리 깊게 내리기를 신께 빌고 빌었건만 기름진 땅에 뿌리 내리지 못한 나는 언제나 도시를 겉돌았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고공 행진 중인 서울의 아파트 지층이 흔들리며 움직이기 시작한 하늘에 금이 갔다 사대문 밖으로는 나가 살지 말아라 아들에게 보내는 여유당 정약용의 편지 어쩌면 좋을까 사대문 밖에서도 올려다보기 어려운 저 집채를 -전문(p. 122) ------------------ * 『가온문학』 2023-봄(35)호 에서 * 김정현/ 2014년 계간『지구문학』으로 등단, 시집『내가 사랑한 사기꾼』외 4권, 동시집『눈 크게 뜨고 내 말 들어볼래』, 그림동화『키가 쑥쑥 마음도 쑥쑥』, 산문집『수수한 흔적』

맏형이니까/ 연제진

맏형이니까 연제진 머리의 옆구리 달동네에 귀가 산다 이목구비耳目口鼻로 구성된 얼굴 서열은 귀가 맏형이지만 사실은 뒷방신세다 눈엔 쌍꺼풀수술 눈썹문신에 매일 눈화장하고 코는 중앙에 모시고 성형으로 오뚝하니 치켜세우며 입술엔 하루에도 몇 번씩 립스틱 단장을 한다 귀에도 귀고리나 피어스를 매달아 놓긴 하지만 얼굴 무대 뒤쪽에서 고작 흔들거리는 백댄서 노릇이다 구멍 뚫어 귀고리 매달고 떼고를 반복하니 고역이다 얼굴엔 구석구석 화장을 하지만 귀화장은 없다 게다가 귀에는 안경과 선글라스를 걸어두고 요즘은 온종일 마스크까지 걸치니 영락없는 짐꾼이다 귓속에서 스마트폰 블루투스 이어폰이 점멸하는 것을 보니 귀가 몸살이 난 모양이다 귀가 없었다면 이 많은 일을 어떻게 처리할까 귀는 아우들 즐기는 무대에서 씬스틸러*가 될 ..

세한도/ 유정남

세한도 유정남 파도에 실려 온 만 리 밖의 문장을 탱자나무 울타리 안에서 읽는다 눈길 행간에 휘몰아치는 바람 계절을 놓아 송백은 뼈마저 푸른가 핏빛 가시 살갗에 어지러운데 동그라미 창이 문자향으로 열린다 구름 밖으로 두루마리 펼치는 세한 붓털은 자유로워 그리움에 먹을 갈아 집 한 채 지었다 소나무 뿌리 길어 가지는 굽어지는데 여백에 핀 서로 잊지 말자는 붉은 낙관 겨워하는 이가 우선* 한 사람뿐일까 -전문(p. 64) * 우선藕船: 이상적의 호 ------------------ * 『가온문학』 2023-봄(35)호 에서 * 유정남/ 2018년 ⟪한국NGO신문⟫ 신춘문예 당선, 2019년 『시문학』으로 등단, 공저『악마의 빛깔』외

차성환_유령의 시간, 청시(淸詩)의 시간(발췌)/ 한 점 하늘 : 이은수

한 점 하늘 이은수 점을 찍기 시작합니다 고달픈 그 시간 속으로 발을 내디뎠습니다 드러난 모래알의 굴곡과 감춰진 영역이 끝없이 펼쳐진 사막 선인장의 몸처럼 물은 안에서 길어 올려야 강이 뜨고 별이 뜹니다 정지된 점은 선으로 움직여 둥글게 큰 곡선을 만들어 나가고 그 틈 사이로 生이 지나갑니다 많은 생각을 떼어놓고 우주와 교신을 시도합니다 서로를 비추며 끊임없이 흘러가는 나선 세계에 붓을 들었다 내려놓는 일 운석의 부스러기가 빛으로 떨어지고 빛이 때론 남빛으로 칭얼거리고 실오라기 같은 숨과 숨 사이는 하얀빛으로 파닥거립니다 내 안에 들어온 청시淸詩는 딱딱한지 말랑한지 애매한 눈물 같기도, 한숨 같기도 합니다 단, 한 점이 물같이 번져 부끄러운 진실에 풀어놓았습니다 -전문- ▶ 유령의 시간, 청시淸詩의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