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이찬_'문질빈빈' 또는 '백비'의 시학을 위하여(발췌)/ 사랑의 발명 : 이영광

검지 정숙자 2024. 2. 16. 03:00

 

    사랑의 발명

 

     이영광

 

 

  살다가 살아 보다가 더는 못 살 것 같으면

  아무도 없는 산비탈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누워 곡기를 끊겠다고 너는 말했지

 

  나라도 곁에 없으면

  당장 일어나 산으로 떠날 것처럼

  두 손에 심장을 꺼내 쥔 사람처럼

  취해 말했지

 

  나는 너무 놀라 번개같이,

  번개같이 사랑을 발명해야만 했네

     -시집 『나무는 간다』(2013. 창비) 전문

 

  ▶'文質彬彬' 또는 '백비白賁'의 시학을 위하여(발췌) _이찬/ 문학평론가

  「사랑의 발명」이 명작의 반열에 오를 수밖에 없는 까닭은, 어마어마한 상상력의 크기와 그것이 수반하는 광대무변한 내용의 '자기 함량 운동'에서 선득한 느낌으로 휘감아 오듯, 이 시는 이영광의 다른 "사랑" 시편들이 보여 주는 생동하는 현장감을 고스란히 이어 가는 자리에서 자기 탁월성의 근거를 마련한다. 그것은 곧장 터져 버릴 것 같은 절박한 실존적 사건인 "사랑"을 박진감 넘치는 구절들의 미친 듯한 리듬  카오스8)로 연주한다. 곧 파열하는 감정의 가파른 오르내림을 낯선 리듬감의 진폭에 실어 행간들로 마주 선 '말과 시간의 깊이9) 그 보이지 않는 뒷면에 감춰진 구구절절한 사연들을 암시적 뉘앙스로 소묘한다. 아니 저토록 시퍼렇게 날 선 시어들과 마디마디의 (···) 말이 있으키는 팽팽한 힘과 긴장의 미학을 여백의 리듬으로 번뜩이게 하면서 '백비의 시학'을 완결짓는다. 

  물론 이와 같은 맥락에는 문질빈빈文質彬彬10)으로 집약될 수 있을 '백비의 시학'을 또 다른 '진리  사건'의 촉매로 삼아, 이영광의 시를 기존의 독법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읽어 가려는 창조적 담론의 포석이, 한국시의 다른 미래를 열어 가려는 '신성한 잉여'의 욕망이 주름져 있다. 여기에는 순결한 시와 예술이 응당 품어야 할 '실존적 체험'의 곡진함과 단단한 시어의 매듭으로 빛나는 '구절들의 기세', 그리고 행간의 깊이가 내뿜는 '화합의 빛살彬彬'을(···) "사랑" 이미지 분석을 통해 현시하려는 간절함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 분석을 통해 한국시의 다른 미래를 모색하고 그 바탕과 무늬를 새롭게 "발명"하고 창안하려는 좀 더 원대한 소망 역시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휘감겨 있을 터이다. 그러나 그 구체적 항목들은 미래시제를 타고 어김없이 회귀할 또 다른 '백비의 시학'에서 기약하기로 하자. (p. 시 205/ 론 205-207)

 

  8) "리듬은 박자나 운율 등과 같은 어떤 규칙성의 운동에서만 발생하지 않는다. 이미 있는 안정적 질서를 단숨에 무너뜨리는 단절과 비약의 순간에도 리듬은 어김없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리듬-카오스, 카오스모스라는 말의 참된 의미 역시, 바로 이 자리에서 기원할 것이 틀림없다. 리듬이란 결국 규칙과 불규칙이 겯고 트는 힘, 그 힘이 현란하게 엇갈리면서 이루어 놓는 무수한 긴장과 이완의 쌍곡선, 곧 카오스모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찬, 「우리 시대 시의 예술적 짜임과 미학적 고원들」, 『사건들의 예지』, 파란 2022, p.62.

  9) "나는 순결한 언어들을 좋아했다. 내가 순결하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과 부합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나는 혼신의 힘을 모둔 결단의 말들과 함께 오랫동안 신중하게 주저하는 말들을 좋아했다. 나는 비명과 탄성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것들이 배어 나오는 말들이나 그것들을 힘주어 누르고 있는 말들을 좋아했다. 나는 말이 거칠다고 해서 비난하지 않았다. 한 비범한 평정 상태에 이르러 그 지경을 모방하여 얻어 낸 유려한 말들에 나는 종종 귀를 기울였지만, 그보다는 그 상태를 증명해 주는 다급한 말들의 진실을 믿었기 때문이다. (중략) 그러나 나는 땀내가 나는 말들을 가장 좋아했다. 그 말들은 어김없이 순결하다." 황현산, 「책머리에」, 『말과 시간의 깊이』, 문학과지성사, 2002, p.6.

  10) "子曰 質勝文則也 文勝質則史 文質彬彬 然後君子(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質(본바탕)이 文(아름다운 외관)을 이기면 野人이요, 文이 質을 이기면 史(겉치레만 잘함)이니, 文과 質이 적절히 배합된 뒤에야 君子이다.)" (성백효, 『論語集註 附 按設』, 한국고전연구소, 2013, p.267) 이 글에서 제시되는'백비의 시학'이란, 『논어論語』의 한 표현에 빗대어 말하면, 문질빈빈文質彬彬의 재발견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듯하다. 따라서 앞서 제시된 『논어』의 '문질빈빈' 관련 문장들을 좀 더 오랫동안 들여다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後略)

 

  '백비'는 유가儒家의 가장 오래된 경전이자 최고도의 철학적 사유가 응축된 것으로 공유되어 온, 『주역』의 64괘 가운데 스물두 번째로 등장하는 '산화비山火' 괘, 맨 윗선의 효사爻辭  "上九 賁 无咎" (上九는 꾸밈을 희게 하면 허물이 없으리라)에서 등장하는 말이다. (이 내용은 책에서< 3 >의 일부임을 참고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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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간 파란』 2023-겨울(31)호 <criticism> 에서  

  * 이영광/ 1998년『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직선 위에서 떨다』『그늘과 사귀다』『아픈 천국』『나무는 간다』『끝없는 사람』『해를 오래 바라보았다』등 

  * 이찬/ 2007년《서울신문》신춘문예를 통해 문학평론가로 등단, 저서『현대 한국문학의 지도와 성좌들』『20세기 후반 한국 현대시론의 계보』『김동리 문학의 반근대주의』, 문학비평집『헤르메스의 문장들』『시/몸의 향연』『감응의 빛살』『사건들의 예지』, 문화비평집『신성한 잉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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