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모이
이현실
을지로 3가 뒷골목
얽히고설킨 전깃줄 아래
하늘이 손수건만큼 보이는 골목 2층
삐걱대는 나무계단 위에
K씨의 말모이 공장이 있다
온종일 탈탈탈
폐지 실어 나르는
이륜 오토바이 시동 거는 소리와
40년 함께 늙어가는 활자들
노안으로 흐려진 자판 위에
머리통만 한 볼록렌즈 바싹 들이대어
문장의 어긋난 뼈를 집어내고
가지런히 가다듬기도 하지
안구 건조증으로 침침한 눈
인공눈물 짜 넣으면서도
까끌까끌 모래알 같은 글자들
흩어진 말을 한자리에 모으지
모래바람 능선을 넘으면서
말들의 발자국을 그러모으는 낙타 한 마리
오늘도 구부정한 노구로
한 권의 책을 짓기 위해
닥나무 숲, 말모이 공장으로 느릿느릿 걸어간다
-전문(p. 160-161)
* 말모이: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사전
시작노트> 인간의 삶을 바꾸는 디지털 노마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시공간의 자유로움과 끊임없이 변화하는 디지털 문화 양식을 거스르며 묵묵히 아날로그 삶의 방식을 고집하는 시인이 있다.
모래바람이 등 떠미는 사막을 홀로 묵묵히 걸어가는 낙타 같은 시인.
삶의 궤적을 돌아보며 결코 자기 노선을 후회하거나 바꾸려 들지 않는다.
구부정한 노구로 저자의 온전한 정신을 품은 책의 집을 지으려고 기둥을 세우고 벽을 세우고 지붕을 덮는다. 어쩌면 그는 근사한 집을 짓는 게 아니라, 세상에 하나뿐인 책의 집을 짓는지도 모른다.
을지로 3가 인쇄소 골목에는 장애인 아내와 함께 폐지를 줍는 허리 굽은 노인과 말모이를 설계하고 제작하는 K시인의 모습이 나란히 저녁노을에 물든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화다. (p.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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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래시학』 2024-봄(48)호 <미래시학 시단>에서
* 이현실/ 2003년 한국예총 『예술세계』로 수필 부문 등단, 수필집 『꿈꾸는 몽당연필』『그가 나를 불렀다』, 시집『꽃지에 물들다
』 외 2권'잡지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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