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5605

붓꽃 피다/ 신덕룡

붓꽃 피다      신덕룡    이름값을 하느라 저렇듯 망설였구나    새로 꺼내든 붓끝에  먹물부터 잔뜩 머금었지만   바람결에 잎새들 뒤척일 때마다 마음이 바뀌고 흔들리는지 한 글자 쓰지 못하고 머뭇거린다 그걸 모를까 멀리서 날아온 나비 한 마리 잠시 머물다 간 뒤   글썽이는, 필설로는 다 하지 못할 그리움이 더 아득해졌는지 붓을 놓아버렸다 팔을 쭉 뻗어 먹물로 얼룩진 손바닥을 펴고 흔들어댄다   눈 크게 뜨고  귀를 활짝 열어 놓았다   잠깐의 머뭇거림 하나 없이 부끄러움도 없이     -전문(p. 144) ---------------* 『시현실』 2023-여름(92)호 에서  * 신덕룡/ 1985년『현대문학』으로 (평론 부문) & 2002년『시와시학』으로 (시 부문) 등단, 시집『소리의 감옥』..

사막의 여우/ 권선옥

사막의 여우      권선옥    바하리야사막 한복판  뜨거운 모래밭  군데군데 풍화하는 푸시시한 돌덩이,  비람에 날아온 풀씨도  싹 트지 않는 허허벌판.  먹을 것을 찾아  느릿느릿 돌덩이 사이를 기웃대는,  어린 여우를 만났다.  발바닥에 불이 나는  저 막막한 모래벌판에는  입술을 적실 물 한 모금조차  없다.  생명은 독하게 야속하고 모진 것,  저 아이도 무사히 자라 어미가 되고  그 어미처럼 새끼를 낳게 해 달라고  나는 그저, 하나님, 하나님  연거푸 하나님을 불렀다.      -전문(p. 121)   ---------------* 『시현실』 2023-여름(92)호 에서  * 권선옥/ 1976년 『현대시학』추천 완료, 시집『감옥의 자유』『허물을 벗다』『밥풀 하나』등, 시선집『별은 밤에 자..

곽효환_'오래된 책'과 '미래의 책' 사이에서(발췌)/ 오래된 책 : 곽효환

오래된 책      곽효환    하늘 가득 펑펑 쏟아진 눈 쌓이고 동장군이  동네 꼬마들의 바깥줄입을 꽁꽁 묶은 날 저녁이면  어머니는 감자며 고구마를 삶고  누이와 나와 사촌들은  구들방 아랫목에 깐 이불에 발을 묻고  할머니의 옛날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어릴 적 약을 잘못 먹은 탓에  길눈이 어둡고 글을 배우지 못했지만  어느새 마을 최고의 흉내쟁이이자 이야기꾼이 된  할머니의 이야기는 밤 깊어도 마를 줄 모르고  아이들은 졸린 눈을 부비며 귀를 세우다가  하얀 눈을 소리도 자국도 없이 밟으며 온다는  눈 귀신에 진저리 치곤 했다   다음 날이면 나는  말 한마디 토씨 하나 숨소리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외워서  녹음기를 틀어놓은 것처럼  그 서사 그 느낌 그 흥분을  에워싼 동리 아이들 앞에서 ..

저물면서 빛나는 사람들/ 곽효환

저물면서 빛나는 사람들      곽효환    작열하는 햇빛과 찌는 듯한 무더위가 깊어  꽃들도 풀들도 지쳐 고개를 떨구는  기울고 시들해지는 저무는 시간 비로소  단단한 중심이 되어 빛나는 사람들이 있다  더 화려하게 피는 능소화 같은   더 그윽하고 강인하게 피는 무궁화 같은  여름 내내 피고 또 피는 백일홍 같은 사람들   1.  책과 거문고, 꽃과 그림 그리고  술과 도연명을 사랑하여  맑은 시냇가에 집을 지은 유학자의 후손*은  기울어가는 나라를 살리고자 하였다  의병운동에 뛰어들었고  학교를 세워 구국 계몽운동에 헌신했으나  끝내 나라가 망하자  지천명이 훌쩍 넘은 나이에  가산을 정리하고 솔가해 두만강을 건넜다  무관학교를 세워 강한 독립군을 양성하고  힘으로 맞서 나라를 찾고자  죽는 날까지..

반사경/ 오승연

中     반사경      오승연    주차장 입구 측백나무 가지에 반사경이 걸려 있다  누가 저렇게 아름다운 눈동자를 만들었을까  측백나무 초록이 한껏 떠받들고 있다   다가오는 것들마다 누르고 자르고 찌그러뜨리는  저 반사경은 유머를 아는 종족 같은데   오늘은 아랫집 새댁의 부른 배를 내 자동차 유리창으로 밀어 넣는다    언제 눈을 깜빡이는지 본 적은 없지만  더러는 저 눈빛을 피해 지나간 사연들도 있을 테지만   사람도 자동차도 한 번 눈에 들면  왜곡된 시선이 진실이 되는지  어쩌다 충혈된 눈으로 이마를 찌푸리기는 한다   핏빛 노을 없이도 뜨거운 눈빛으로  산목숨에 제 목숨을 내걸고 있는 반사경 얘기일까   우리 동네에는   측백나무에 눈이 달려있다는 소문이 있다     -전문(p. 220)..

그릇, 되다/ 류미월

그릇, 되다      류미월    콩 심은 데 콩 나는 건 흙이 만든 진리죠  어른들은 올바르게 참되게만 살라지만  흑흑흑  잘못이 없어도 그릇되다 말해요   성당 옆 모퉁이에 문을 연 '그릇된 흙'  간판을 읽다 보니 조금은 당황스럽죠  그릇이 된다는 건지  흙이 잘못이라는지   잘못된 흙이라면 그릇이 되지 않겠죠  식탁 위에 장식장에 우아하게 자리잡은  올바른 도자 그릇이  꽃을 물고 피어나요     -전문(p. 99)  ------------------  * 『시와문화』 2024  여름(70)호 에서  * 류미월/ 2008년『창작수필』 & 2014년『월간문학』으로 등단,  산문집『달빛, 소리를 훔치다』, 시조집『나무와 사람』

흔들리는 빛/ 김삼환

흔들리는 빛      김삼환    말을 잃어 쓰지 못한 빈 노트를 앞에 놓고  천 년 전 앙코르왓 연못 속에 잠긴 하늘  흔들린 불빛마저도 멀어지는 적도의 밤   추억 깊은 사진 한 장 꺼내다 마는 시간  손을 놓고 돌아서는 뒷모습이 아득쿠나  제 자리 찾지 못하고 나뒹구는 석상 하나      -전문(p. 97)      ------------------  * 『시와문화』 2024  여름(70)호 에서  * 김삼환/ 1991년『한국시조』로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시조집 『적막을 줍는 새』『왜가리 필법』『묵언의 힘』등

철야/ 김창훈

철야     김창훈    밤이 되었다  하루의 문장이 소금에 절인 듯 쪼그라든다   바다를 피해 사막으로 갔다  천장에는 달과 별이 보이지 않는다   목이 말랐고 모래는 차갑다  낮에 보였던 발자국을 바람이 가져갔다  방향에 대해선 아무도 모른다   사막과 달의 색은 잘 어울린다  모래에서 살 냄새가 난다  얼굴을 묻어버리는 방법에 대해 알고 있다  한쪽은 사라지고   눈썹 사이에서 시계 소리가 난다  먼 곳으로부터 가까운 곳을 기억하는 습관   내일의 문장을 여러 번 연습해 본다  자주 몸을 뒤집는다   입에서 모래가 씹힌다  새벽 네 시,  내가 나를 밀어내고 있다    -전문(p. 90-91)    ----------------------  * 『시와문화』 2024  여름(70)호 에서  * 김창..

'내가 보이면 울어라'/ 김효운

'내가 보이면 울어라'         강이나 하천의 수위가 낮아지면 바닥의 돌이 물 밖으로 드러나게 되는데 이때 드러난 돌에 문구와 연도를 새겨넣었다. 이 돌을 헝거스톤이라고 한다.      김효운    체코 엘베강에서 1616년 '내가 보이면 울어라.'라고 새긴 돌이 발견되었다는데   나비가 발바닥에 꽃가루를 묻히듯  출생연도를 이마에 타투로 적어두고  오갈 든 강물 속에서 드러난 맨살   빠르게, 편하게, 쉽게  꽃과 바람 사이를 헤매는  이기심을 피해 버티고 버티다가  죽은 꽃잎처럼 달린다   내가 찍은 탄소발자국 줄이는 길을  너에게 묻는다   곧장 달리고 싶지만  기억을 되짚어 되돌아가는 길은 너를 복기하는 형식이다  낯설지 않다    -전문(p. 81)    -----------------  ..

연대의 힘/ 양선규

연대의 힘      양선규    처음에는 아주 작은 하나의 빗방울이었다 오랜 가뭄이 들면 간절한 기다림이었다가, 큰비 내려 홍수가 나면 원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바다에 도착하자마자 먼저 도착한 물들과 부둥켜안고 크게 기뻐했으나 금방 서로 멀어져 가며 기약 없는 이별을 했다 오랫동안 보이지 않다가 부딪치고 깨어져 하얀 포말이 되어서야 알았다   잊힌 게 아니었다 빙산처럼 각자의 포부대로 큰물과 합류하고 있다는 것을, 바다에 와서 보았다 아무리 큰 폭풍이 불어도 끄떡 않는, 어깨와 어깨 모여 만든 깊고도 푸른 장엄한 바다의 고요를 보았다    -전문(p. 68)   ----------------------  * 『시와문화』 2024  여름(70)호 에서  * 양선규/ 1998년『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