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5605

연차휴가/ 유현아

연차휴가         되어진다고 믿는 것들      유현아    우리는 이렇게 살지 말자, 라고 말하는 사람 앞에서  그럼 우리는 다르게 살아야지, 라고 주장하는 사람   앞으로  쏟아져 내려오는 야근 뒤의 사람들은  어떤 기대도 하지 않고 떠밀려 가는 구름처럼  하루의 하루를 비워 둔 채로 산다고 말하지   (아버지는 사장을 꿈꿨다)   이 세상이 아름답게 되어질 거라고 말하는 사람은  오후 네 시의 따분함처럼 적막을 기다리고  어깨와 어깨가 부딪히는 시간은  금방 사라지게 되어질 거라고  상자 안에 들어가서 군데군데 빈말을 뿌려 놓는다    (아버지는 망했다)   야근을 끝내고 집으로 가는 지하철을  기다리는 사람이 어제보다 많은  이유를 알고 싶지 않다  봄이 오고 있었지만 여전히  겨울 코트를 ..

정체전선/ 류성훈

정체전선     류성훈    아버지가 심은 호박들이 가뭄에 모조리 죽은 다음 장마가 시작된다 나는 당신 대신 화를 냈고 당신은 호박 대신 내게 화를 냈다 뭐든 때를 맞추지 않으면 소용없다고, 구청에서 무수히 심었던 들꽃이 중장비에 다 엎어지는 공원에서 이럴 거면 왜 심었냐고 행인들이 허공에 따졌다 나는 허공에게 욕을 먹었다  잡초만 뽑다 벌써 무릎이 아프고 완전군장으로 산 몇 봉우리를 넘어 다니던 관절은 언제 어디로 가 버린 건지, 아무도 아무에게도 안부를 묻지 않던 그때부터 우리는 잡초만 뽑았다 작년에도 올해도 소나무 탁상에 생긴 새 구멍에서 톱밥이 다시 쏟아져 나왔고 이번이 마지막일 거라고 자부했다  호박잎보다 더 큰 토란잎보다 더 큰 해바라기 잎이 지나가던 볼살을 긁으면 피부보다 따가운 태양이 도시..

생은 무거워/ 이영춘

생은 무거워       공동묘지 앞을 지나며        이영춘    생들이 흙속에 누워 있다 피안의 언덕 그 무덤 속에  무덤 속에서 저마다 알 수 없는 방언을 쏟아낸다  '생은 무거워, 무거워' 중얼거리는 소리 바람을 타고 건너온다  오백 년 전 세世, 사라진 내가 안개로 피어올라 무덤을 쓰다듬는다  간헐적인 숨결처럼, 파리한 눈물처럼 무덤들이 하얗게 흔들린다  '박제가 된 천재를 아시오'와 같은 박제들이  박새 같은 울음소리를 낸다 허공으로 하얗게 부서지는 날개  알약을 삼킨 생, 세상을 등진 생, 강물에 뛰어든 생,  빗물로 흐느낀다  박제 속에서 박제를 해부하면서  생이 무거워, 너무 무거워, 가쁜 숨 몰아쉬면서  흙무덤 속으로 간다  그 무덤 위로 스러지는 구름 한 점      -전문(p. 2..

첫닭/ 박만진

첫닭     박만진    한가윗날 보지 못한  보름달을   양력 시월  새벽 일찍 보네   저 먼 첫닭,   얼마나 목을 길게 빼면  울음 또한 저리 길까   이웃 일손들의 새벽잠을  서둘러 깨우려 하나   저 먼 첫닭,   얼마나 목을 곱게 빼면  울음 또한 저리 고울까   그래, 사람아!   맨 처음 우는 닭이  첫닭이 아니라   맨 처음 듣는 소리가  첫닭이네   -전문(p. 200-201)  ---------------* 『시현실』 2023-여름(92)호 에서  * 박만진/ 1987년『심상』으로 등단, 시집『오이가 예쁘다』『붉은 삼각형』『바닷물고기 나라』『단풍잎 우표』등 10권, 시선집 『꿈꾸는 날개』등 3권

탑/ 박금성

탑         원원사지 동 삼층석탑     박금성    그는, 바람과 구름이었으나  소원의 흔적   오로지, 하나의 소원  더 나아갈 수 없는 곳을 향하여  쩡쩡, 땡볕을 가르며  오르는 길을 만들었을 것이다   층층이 쌓이는 셀 수 없는 갈등과  선명해지는 사랑들  그럴수록 굳게 다듬어지는 불퇴전의 결연   그는 구름처럼 지워지고  바람처럼 잊혔어도  운명이 나아갈 수 없는 곳에서  눈과 손이 멈추어야 할 곳에서  탑의 수연에 마음을 가두었을 것이다   지금도 그의 소원이  더 높이 오를 듯 하늘이 파랗게 열리는데   무명에 탑신의 옥개가 떨어져 나가고  벽력에 옥신이 흔들려도  오르고 오를 듯 원력을 다시 세우는데   그래, 활화산이 탑을 덮친들  그의 소원이 끊기겠느냐  미래가 다하여 세상이 멸..

봄밤/ 함태숙

봄밤     함태숙    이 거대한 짐승을 끄고 돌멩이 하나에 눈동자를 묻는 것을 보았다  영원에 필적하는 것들이 하나의 우연과 하나의 개별성에 의탁해 오는 밤을   별과 돌의 공명  내포하기 위하여 분열한 것들   지금 오는 것은 돌아오는 것이다  자기를 애도하기 위하여  빛은  작은 돌처럼 꾸르륵 꾸르륵 소리를 내며  지워진 멧비둘기 식도 안에서 피어난다   아난다여, 이제 나의 입은 어느 곳에 묻을 것인가   불타는 심장으로부터 분리된 첫 번째  환각을  사라지는 얼굴에 드리우고 드리우고      -전문(p. 189) ---------------* 『시현실』 2023-여름(92)호 에서  * 함태숙/ 2002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새들은 창천에서 죽다』『그대는 한 사람의 인류』『토성에서 생각..

아무도 없는 몸/ 정병근

아무도  없는 몸      정병근    혼자는 언제든 상하기 쉬운 자세로  뒤통수에 깍지를 끼거나 다리를 턴다  발톱이 자라고 털이 우거진다   비밀 하나를 공유할 때  우리는 겨우 신뢰할 수 있다   태어나서 죽는 생은 정해져 있어서  당신의 정면은 회피하기 좋다  시간은 무수한 측면으로 쪼개지다가  등을 남기며 사라진다   버려지는 관심 밖에서 증오가 자라고  몸은 절벽 앞에 선 자세로  터무니없는 적의를 불태운다  숭고한 원수가 온다   아무 것도 안 하는  말없는 말들이 수북이 쌓인 구석엔  먹고 흘리고 닦은 것들이 불룩하다   인간은 나무에서 내려온 혼자   여럿의 눈을 벗어난 몸 하나가  어둠 속을 배회하다가  무언가를 줍거나 툭 던지고 사라진다       -전문(p. 182-183)  ---..

납작하다는 말/ 이현

납작하다는 말      이현    겨울눈 내리는 날 엄마는 수제비를 끓였다  반죽을 얇게 펴야 맛있는 수제비가 뜬단다  얼기설기 묵은지 잘라넣은 펄펄 끓는 물에  하얗고 평평한 조약돌 같은 수제비가 떠오르면  어두운 강가에 나가 남몰래 물수제비를 띄웠다   그래, 납작하다는 말 생각하면 참 슬프다  각지고 모난 것들 얇게 펴는 그런 일  눈도 코도 입도 있는 듯 없는 듯  해저 연체동물처럼 뼈도 없이 납작하게 아, 평평하게  바람 부는 세상 위로 부유하며 떠가는 그런 일   엄마는 떠나고 몸살기 드는 겨울 저녁  묵은지 잘라 넣은 물 위에 뜬 수제비 먹는다  살아가기 위해 습관처럼 착하게 아, 비겁하게  기울어진 세상 눈 감고 모난 생각 부러 누르고  어둠 내린 허공에 목숨 하나 걸치고 떠가는 그런 일 ..

붓꽃/ 이근영

붓꽃     이근영    노란색 불빛으로 색칠한 카페 테라스  짙푸른 색의 우울이 숨어 있는 하늘  풍부하게 채색이 되는 밤   너에게 편지를 쓸게   까마귀들이 몰려드는 끊어진 길가  회오리바람에 휘둘린 별이,  별들이 빛나던   그림을 너무 자세히 보다가 목이 칼칼해졌어  날숨이 울대마개를 스치고 나올 때마다  보라색 꽃잎이 바스러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거야   살아있으면 다행인 거야  열 번도 더 죽을 수 있었는데   너무 오랜 시간 책장을 넘기고 있었어   컴컴하게 덧칠한 색채를 긁어내면  나이프 가득 묻어나는 어두운 피   진화하는, 너는  피를 묻히는 것  피 묻은 너를 그리는 것  캔버스에 너의 피를 뿌리는 것   곧게 목을 세운 붓꽃은 정원의 구석에 서서 휘돌아 가며 빛나는 별의 꼬리를..

부고/ 원탁희

부고     원탁희    어젯밤 잠을 설쳤다  상여 나가는 꿈속  상두의 구성진 노랫가락에 빠져  어허 어허이 이제 가면 언제 오나  그런데 친구가 상여 위에서 앉아 손을 흔들면서 웃고 있었다  왜 네가 거기 앉아 있으며 어디 가느냐고 묻고 싶은데  말이 나오지 않고 으으으 하다가 잠이 깨었다  이른 아침 날아온 문자  어젯밤 그 친구의 부고였다  어 참 허 참  어허 허 참  찬물을 한 잔 들이켜고서야 정신을 차린다.     -전문(p. 149)  ---------------* 『시현실』 2023-여름(92)호 에서  * 원탁희/ 1996년『시와시인』으로 등단, 시집『세상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