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5605

지금, 베를린/ 정선

지금, 베를린      정선    연두가 수의를 벗었다   옥죄다,  를 생각하면 자꾸만 치밀어  빨간 문어가 돼   연두는 곁에 두고 싶은 안식  지난해 몰래 숨겨 놓은 안반데기에 연두가 꽃핀다   주머니엔 부정의 돌멩이들이 늘어 가고  식은 사랑은 꽃으로도 데워지지 않지   하나 연두는 질리지 않는 얼굴   맞은편 좌석에서 볼풍선을 불어넣는 중년의 오후  헤어지기 싫어 쪽쪽거리는 연인의 오후  오후는 서글프다  그 푸르름 위로 느닷없는 우박의 화(火)   깨진 얼굴에 거울을 비치면 위로가 되는 밤  생각의 벽돌로 견고한 성을 쌓는 안온한 밤   그런 밤은 순치의 시간  슬픈 자기양육의 시간   천사는 흑백 베를린을 사랑했지  화해의 키스로 베를린  희망을 악수하는 베를린  젖은 솜이불을 덮고도 화려한..

공동저자/ 김화순

공동저자     김화순    패션의 완성은 멋진 신발이라면서  그 안의 발은 제대로 챙겨준 적 없지   나의 부속으로  살아온 너는  늘 나를 눈부신 곳으로 데려가곤 했는데   얼마나 오래 참고 걸어온 걸까   골퍼의 볼품없는 발이나 발레리나의 끔찍한 발가락은  무대에서 꽃으로 피어날 때 숨죽이고 있었지   가끔 통증으로 말 걸어오는 너는  달의 뒷면처럼 묵묵히 나의 앞길을 비춰주었지   내가 이룬 모든 것은 너와의 협업  환한 웃음 뒤에는 고독한 너의 행보가 있지   나는 네가 써 내려간 기억의 변천사  너는 내 책의 공동저자야     -전문(p. 95)  ----------------------- * 『다층』 2024-여름(102)호 > 에서 * 김화순/ 2004년 『시와정신』으로 등단, 시집『구름출..

대나무/ 조서정

대나무     조서정    사군자 중 막내로 이름을 올렸으나  한 번도 군자로 살아본 적 없으며  군자로 살고 싶은 생각은 더더욱 없소이다   목재로도 쓸 수 없어 나무에서도 퇴짜 맞고  풀에도 끼지 못하는  이도저도 아닌 양다리외다   낭창거리며 살아온 선비들이 덮어씌운  충절과 절개의 이미지 덕에  바람에 흔들리며 풍류를 즐기며 살아온  낭만파이외다   텅 빈 뼈대 하나로 흐느적거리면서도  쉬이 꽃을 내어주지 않는 차가운 가슴으로  바람의 옹이로 버텨온  천하의 한량이외다     -전문(p. 104) ----------------------- * 『다층』 2024-여름(102)호 > 에서 * 조서정/ 2006년 『詩로여는세상』으로 등단, 시집『모서리를 접다』『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나라고 할까』, 산문..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4/ 정숙자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4      정숙자    눈뜨고 있지만 바라볼 데가 없습니다. 겨우 일어선 갈비뼈들이 차례도 없이 무너지는데, 당신 말고는 그 누구도 난파에 휩쓸리는 태양의 파산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1990. 10. 24.)                  “한 사회가 썩을 때는 시인이 맨 나중에 썩는다.   ∴ 시인이 썩었다면 그 사회는 다 썩은 것이다.”   저의 등단 초기, 『문학정신』 사무실에 근무ᄒᆞ셨던 이추림 시인(1933-1997, 64세)께서 장차 시인으로서 지녀야 할 기본 예의와 평생 두고 새겨야 할 덕목을 넌지시 일러주시곤 했는데요.   어제는 님의 친필 ᄉᆞ인이 든 시집 열두 권을 수북이 꺼내 놓고 망연히   오래   바라보았습니다. 요즘 들어 저 깊은 말씀이 자주 떠오르..

수도암 별사/ 이상구

수도암 별사      이상구    바람의 법문 소리 귀담아 들은 걸까  굴참나무 우듬지 하얗게 반짝인다   늘 푸른 겨우살이들  하안거 속에 든 날   인현왕후 탑돌이 오랫동안 생각했나  천년을 기다리다 말라버린 이끼 안고   산문 밖 수많은 풀꽃  은은하게 웃는다   하산한 산신령이 손 모아 합장한 듯  구천의 허공 속에 흐르는 구름 삼켜   날아온 참매미 한 마리  화엄경을 외운다    -전문(p. 79) ----------------------- * 『다층』 2024-여름(102)호 > 에서 * 이상구/ 2016년『월간문학』으로 등단, 2021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당선

안시성(安市城)*/ 박재화

안시성安市城*       박재화    중원을 차지하고 티벳 돌궐 등을 제압하여 기세를 떨치던 당 태종 이세민, 그러나 643년 황제의 위신이 떨어져 태자도 마음대로 못 세우고 신하들 앞에서 자살소동도 벌이다가 권위 회복차 644년 2월 고구려**에 선전포고를 하였으니   유목민 기마병을 앞세운 그의 50여만 대군은 개전 초 개모성 비사성 요동성 백암성 등을 점령하며 기고만장, 드디어 645년 6월 20일엔 안시성 가까이 이르렀으니   이때 고구려는 연개소문이 수도를 지키면서 대대로大對盧 고정의高正義로 하여금 군사 15만을 이끌고 이세민과 맞서도록 하였으니   고정의는 북부욕살 고연수高延壽와 남부욕살 고혜진高惠眞에게 군사 4만을 주어 수비위주로 싸우면서 적을 피곤케 하고 보급망을 끊어라 당부했건만 젊은 고..

매지리 호수/ 김성수

매지리 호수      김성수    호수 낀 산책길에 벚꽃 잎이 날리면  하르르 날아가는 수많은 꽃나비들  눈부신 사월 시공時空에  춤사위가 고와라.   호수가 너무 맑아 하늘도 빠져 있고  하늘을 흐르던 구름도 빠졌는데  동동 뜬 구름장들을  물오리가 건져 먹는다.   사람도 나무들도 물구나무로 서서  온 하루 그렇게 빠져 있어도  모두가 흥겨워하는  매지 호수 산책길.   호수에게 살며시 물어 보았다.  무엇이 우리 맘을 사로잡고 있느냐  호수는 빙그레 웃기만 한다  인자한 어머니 미소와 같이.     -전문(p. 68)   ----------------------- * 『다층』 2024-여름(102)호 > 에서 * 김성수/ 1984년 ⟪조선일보⟫ 동시, 1994년⟪평화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200..

누군가 툭, 운다/ 박희연

누군가 툭, 운다     박희연    우리는 봄마다 목련을 센다.  우리는 우리였지만  저마다 혼자 그 꽃을 센다.  수를 세는 일은 늘 지루해  숫자가 지루할 때쯤  지루한 목련이 떨어진다.  목련이 지나간 골목 철쭉이 피고  철쭉이 지나간 골목 장미가 피고  장미가 지루할 무렵 장마가 온다.  그 골목에서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애인은  두 번째 괄호를 열고 시름에 잠긴다.   세상에 해명해야 할 일들은  애써 찾지 않아도 꽃처럼 피고 지는데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괄호를 친다.  다시 우리는 빗소리를 듣는다.  저마다 혼자 누워 그 소리에 젖는다.  숨죽이고 기다리던 누군가  툭, 운다.  한 걸음 경계 너머 저 바다  한 생 버려져 녹이 슨 저 괄호   장마가 지나간 골목 풀벌레들 울고  풀벌레..

몽돌/ 김현숙

몽돌     김현숙    물은 천리를 흘렀는데  그대 한 자리에 앉아  천 날의 물결을 깎았는가  가파른 주의주장도 누그러뜨리고  날 선 입도 잠잠해졌구나    가끔 자갈거리며  해소기침 끓는 소리  수 만 바람과 부대끼었나  엎어지고 깨진  파도의 집채 가라앉아서    -전문-  ---------------------- * 『한국시학』 2024  여름(70)호 에서 * 김현숙/ 1982년『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쓸쓸한 날의 일』『꽃보라의 기별』『물이 켜는 시간의 빛』『소리 날아오르다』『아들의 바다』외 다수

사람이 위안이다/ 박재화

사람이 위안이다      박재화    살다보면   사람에 무너지는 날 있다  사람에 다치는 날 있다   그런 날엔  혼자서 산을 오른다  해거름까지 오른다   오르다 보면  작은 멧새 무리 언덕을 넘나든다  그 바람에 들찔레 흔들리고  개미 떼의 나들이도 보인다   그림자 없이 내려오는 숲속  순한 짐승들  어깨 비비는 소리 가득하여    사람에 무너지는 날에도  사람은 그립고  사람에 다치는 날에도  사람은 위안이다    -전문(화보 & p. 78-79)   ---------------------- * 『한국시학』 2024  여름(70)호 에서 *  박재화/ 1951년 충북 출생, 1984년 『현대문학』에 「도시의 말」연작으로 2회 추천완료 등단, 시집『도시의 말』『우리 깊은 세상』『전갈의 노래』『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