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5605

심금(心琴)/ 이복현

심금心琴     이복현    내 안의 거문고는  폭풍을 견딘 풀잎 하나  일어서 흐느낄 때  함께 운다.   견고한 산을 울리고  험산 준령을 몇 고개 넘어  하늘에 닿을 때, 마지막  줄이 끊기듯 절규한다.   나의 거문고는 다만  풀잎 하나로 울고  울음은 멀리멀리  천 산을 흔든다    -전문(p. 41-42)     ----------------------  * 『시와문화』 2024  여름(70)호 에서  * 이복현/ 1994년《중앙일보》 시조 장원으로 등단, 시집『사라진 것들의 주소』, 시조집『눈물이 타오르는 기도』등

암벽등반가 K에게/ 김종태

암벽등반가 K에게      김종태    파도가 바다에만 있는 게 아니라고 그에게서 들은 적 있다 슬픔이 이승에만 있는 게 아니라고 그에게서 들은 적 있다 그리움이 사랑에만 있는 게 아니라고 그에게서 들은 적 있다 그의 이력을 눈치 챈 누군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을 때 어느새 그는 먼 산정 위 전신주로 서 있었다   오르고 또 내리는 동안 그의 청춘은 모래알처럼 산산조각 났다 그는 자신의 몸에서 부스러져 내린 모래알을 모아 거대한 부처를 만드느라 주말마다 단단한 절벽을 기어올랐다 심산의 기도처를 찾는 수도자처럼 수시로 기어올랐다 집채만 한 돌의 둔감함을 견디며 돌담의 층계를 맨발로 더듬었다 결국 올라간 그 끝에서 투명한 실오라기를 붙잡은 거미처럼 빙글 흔들리다 다시 사뿐한 하강을 준비하였다   아, 눈부신 ..

이끼꽃/ 최옥

이끼꽃      최옥    이끼에 꽃이 피었다 이끼에도 꽃이 피다니  물기 마를 날 없는 습지에서  수도승처럼 사시사철 옷 한 벌로 사는 줄 알았지   숨소리도 내지 않고 엎드린 채  물이 지나간 자리, 그늘이 머물던 때를 놓치지 않고  조용히 영토를 넓히더니 쌀알 같은 꽃을 피웠다   점점이 찍어놓은 암호 같은 꽃  가장 낮은 자리에서 핀 어린 백성 같은 꽃  어쩌면 햇빛에 대한 반란일까  쌀알 같은 이끼꽃에서 푸른 숨소리가 들린다     -전문(p. 35) ---------------------- * 『시와문화』 2024  여름(70)호 에서 * 최옥/ 1992년『시와비평』으로 등단, 시집『엄마의 잠』『눈물 속의 뼈』외 다수

최형심_거대 기계문명과 혁명 사이에서 꿈꾸다(부분)/ 동학매화 : 김송포

동학매화     김송포    만세운동을 하던 동학혁명기념관 앞 햇살 비추는 곳에서 농민의 외침을 들어보았나 읍 장날 만세 부를 준비를 하다가 태극기를 채소 가마니로 위장하여 남문까지 운반하여 시위에 돌입하다   만세 소리 학교 다닐 때 퍼져가거나    행진하다 총격 소리에 놀라 흐트러지거나   집합하여 시위를 이어간 소리 들어보거나   5.18 역전 바닥에 누워 있거나    물러가라는 외침과 비슷하거나   매서운 추위를 이겨낸 저항이   추위와 바람을 안고 피어난 혁명의 꽃   경기전 안에서 낙엽을 뿌리며 놀거나   농민 외침의 진격 소리 들어 보거나   대화의 첫 망울을 보고 눈앞에서 포효하자   질서에서 방해받던 사람이 화들짝 피어나   만세를 부르면 합창이 되어   얼어붙은 땅에서 올라온 매화향이 ..

2월에 새로 사귄 친구들/ 김인호

2월에 새로 사귄 친구들     김인호    2월 들어 황새를 만나면서 뱁새가 보고 싶어 뱁새를 찾다가 원앙을 만났고 원앙이 동박새를 소개해 줘 동박이를 만났고 동박이를 만나러 다니다가 흑두루미 주소를 알아 찾아가 인사를 나눴고 그 집에 함께 사는 독수리까지 만났다 지난 주말에는 '지리산 사람들' 총회에 갔다가 함양 엄천강 호사비오리를 만났는데 렌즈가 작아 잘 담아주질 못했다 조만간 대형 망원렌즈를 구입하게 될 것 같은 예감이다 보내준 흑두루미 사진을 보고 아이들이 흑두루미를 보러 오겠다고 한다 도시의 아이들이 나의 친구들에게 관심을 보여주니 기쁜일이다 그렇다고 새로 사귄 친구들 때문에 그대를 잊은 것은 아니다   전문(p. 32)   ---------------------- * 『시와문화』 2024  ..

커피하우스에서 생긴 일/ 이정현

커피하우스에서 생긴 일      이정현    문래역 모 카페에서 B를 기다리며 끄적인다  커피값 영수증에 오선을 그리고  높은음자리표랑 음표랑 쉼표 몽땅 그려 넣어도  지루함에 색다른 지루함으로 옮겨 앉는다   영수증을 뒤집어 글자가 가득 박힌 종이 위에    아메리카노는 쓰다 써서 맛있다, 고 쓴다  투 샷만큼 진환 기다림으로 말똥거릴 때  내 등을 치는 이, B다  환하게 안아주는 웃음이 마키아토처럼 일어나  내 손 위에 얹힌다  잘 포개어져 욜랑거리던 어느 긴 봄날.     -전문(p. 253)   ---------------------- * 『한국시학』 2024  여름(70)호 에서 * 이정현/ 2016년『계간문예』로 등단, 시집『점』외 3권, 평론집『60년대 시인 깊이 읽기』

주암정에서 뱃놀이/ 김다솜

주암정에서 뱃놀이      김다솜    오래된 유물 닮은 전설의 그 배는  소나무향기와 금천 물소리를 가득 싣고  연꽃 가득한 연못을 지키는 병풍입니다   거센 눈보라와 태풍에 사라지지 않은  한 폭의 풍경화는 장마와 가뭄을 견디고  뱃고동 소리 없이 항해하는 버팀돌입니다   주암정에서 그림을 그리고 시를 짓던  선비들을 꿈꾸는 미래로 초대를 했지요   21세 장원급제한 난재 채수蔡壽 6세손  채익하가 머무는 정자에 꽃과 새들이 모여  어기영차 꽃놀이와 뱃놀이를 즐겁게 합니다   그곳에 머물고 있는 귀한 배를 타고  채수 후손들은 경천섬 바라보는 낙동강  문학관 설공찬전축제 참석을 하셨지요      -전문(p. 246)   ---------------------- * 『한국시학』 2024  여름(70)호..

아무도 오지 않아서 좋은 여름 외 1편/ 김해화

아무도 오지 않아서 좋은 여름 외 1편      김해화    보냈다  그이들은 오지 않을 것이다   떠났다  그이들은 오지 않을 것이다   비우고 간 곳에 봉숭아를 심었다  채송화도 심었다   피지 않던 꽃들이 피었다  봉숭아도 채송화도 피었다  고향 떠난 뒤로 오랫동안 꿈꿔왔다   꽃밭에 비로소 비다운 비가 온다  아무도 오지 않아서 좋은 여름이다     -전문(p. 202)       ------------------------------    코로나 2021 추석    명절 맞네  외제차 고급차 줄을 서서 골목길 올라가네  환하시네 푸른 하늘 햇살   대문이라도 걸어 잠그고  12퍼센트 고소득층 통장잔고 23만 원 감추고 싶지만  세든 집 대문간에 문짝이 없네   어둔 방에 숨어 있자니 마당에 봉숭..

유월/ 정겸

유월     정겸    5월과 7월 사이  사방을 둘러보아도 모두가 닫혀있다  푸른 장막에 가려진 비밀 정원 같은 계절   주목나무 산길을 따라  비자나무 숲길을 따라  플라타너스 가로수 길을 따라  되돌아보니 참으로 멀리도 왔다   공원 모퉁이 담장에서 아무런 말도 없이  언제나 제 자리 지키는 능소화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도  아무 일 없는 듯 주황색 얼굴 화사하다   걸어오는 동안  나와 당신의 간격은 유월처럼 어설프다  메타세콰이아 즐비한 공원을 함께 걸었던 시간들  붉은 꽃이 언제 피었는지 기억 아득하다  이제는 나무도 시간도 늙어 시들어버렸다   덩굴 장미꽃잎이 하롱하롱 마른땅 위로 떨어지는  봄도 여름도 아닌 애매한 유월     -전문(p. 178-179)  ------------------..

상생/ 박현솔

상생     박현솔    농촌 체험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나이 든 선생님들이 농사짓는 법을 가르치고  도시에서 온 아이들이 땅을 일구고  돌을 가려내서 지지대를 세우고  모종을 심고 흙을 덮은 후 물을 주는  모든 과정들이 일사천리로 흘러간다  아이들은 흙의 비밀을 더 알고 싶은지  집중해서 듣고 또 만져보기도 한다  그때 갑자기 한 선생님이 징을 세게 두드리며  선창을 하고 아이들이 입을 모아 함께 외친다  벌레들아, 약을 뿌릴 거니까 얼른 피해라  벌레들아, 약을 뿌릴 거니까 얼른 피해라  시간이 없으니까 그만 앞에서 내려와라  징 소리와 함성이 사방으로 울려 퍼지고  동네 사람들과 개들이 함께 구경 나와서  그 순간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는데  한가롭게 잎사귀에 붙어서 단물을 빨던  벌레들이 깜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