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5605

예쁜 여자만 좋아하는 아들아/ 유애선

예쁜 여자만 좋아하는 아들아      유애선    뒷동산엔 못 생긴 여자 아까시나무와 결혼한  키 크고 잘 생긴 남자 소나무가 산단다  여자는 우아하지도 않고 가시까지 달린 볼품없는 나무  오죽하면 단독주택과 소개팅을 하면 번번히 퇴짜를 맞았을까   지나가던 길고양이도 안 쳐다보는 여자와  수많은 아파트와 단독주택에게 둘러싸여 있던 저 남자는 왜 결혼했을까  깎아 놓은 밤톨처럼 잘생긴 소나무가  황폐한 땅, 비탈진 곳에서도 잘 자라는 아까시나무에게 반한 걸까   둘은 얼마나 사이가 좋은지  뒷동산 신혼집에서 아까시꽃 향기와 송홧가루가 폴폴 날린단다  그리고 양가 가족들과도 친해서  직박구리 엄마, 아빠, 까치 장인, 장모  웃음소리가 끝이 없단다   예쁜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아까시나무에게  어쩌..

월정사 부엉이/ 박청륭

월정사 부엉이      박청륭    대관령  월정사 석불 귓부리에서  부엉이 소리가 들린다.  밤새 울고 있는  울고서도  아직 울고 있는  둔탁한  목탁,  두툼한 부엉이  소리   -전문(p. 175)   --------------------- * 『시현실』 2024-여름(96)호 에서 * 박청륭/ 1937년 일본 교토 출생, 1962년 계명대 졸업, 1975년『현대문학』으로 등단, 1978년 첫 시집『불의 가면』 외 다수

병아리 유치원/ 박권수

병아리 유치원      박권수    돗자리 속으로 비를 피해 들어간 아이들  톡톡 소리를 낸다  또래의 손짓 몸짓에 통통해진 눈동자  더 가까이 더 은근히  이런 은밀함 처음이야, 히히  눈빛마다 여우나 강아지 고양이들이 들어가  비 온 하루를 덮고  여기저기 터지는 풍선 사이로  달아나는 구름   맨 앞에 젖은 아이를 다른 아이가 당기고  그 아이를 또 다른 아이가 당기고  아이들 옷깃이 모여 까르르 까르르 웃는다  서로의 색깔을 묻힌 웃음소리가  귓가에 작은 솜털마저 토닥여 주고는  시간이 시간을 업고 내려와  젖은 병아리 털어주고   고개만 끄덕이던 하늘  푸른 나뭇가지에서 툭 떨어진다  환하게 웃는 병아리  순심주간요양원에 노랑꽃이 핀다    -전문(p. 170-171)  -------------..

비로소/ 문현미

비로소               서대문형무소    문현미    콩밥 한 덩이로 끼니를 채우고 있었다는  그 한마디에   빈대와 벼룩이 득실거리는 곳에서 버텼다는  캄캄한 고백에   염천에 똥통이 끓었고 악취가 온몸을 덮쳤다는  폭력적인 이상 기후에   어느 누구도 괴로워하지 않았고  샛별처럼 빛나는 눈들만 있었다고   이름도, 출신도, 고향도 다르지만  바라는 것은 오직  잃어버린 나라를 반드시 되찾겠다는  시퍼런 얼음장 절규에   와락, 떨고 있다   가진 것이라곤 목숨뿐이었던 그들   전부인 만신창이를 오롯이 던져서 얻고 싶었던  꿈의 발화는   생지옥 같은 겨울이 지나가고 난 뒤에야  피어났다, 비로소     -전문(p. 166-167)  ---------------------- * 『시현실』 20..

이팝나무 아래서/ 맹문재

이팝나무 아래서      맹문재    밀려오는 파도의 저 너머에  얼굴들이 있구나  바위처럼 침묵하면서도 눈뜨고 있었구나   힘은 가까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요란한 데만 있는 것이 아니고  여러 방향에서 오는 것도 아니구나   파도를 밀고 오는 힘은 나의 과거일 것이다  나의 선택일 것이다   이념이 약하고  경험이 부족하고  전망을 못 가져   분노하지 못한 채  고리高利에 참사당한 시간들   가난한 뿌리가 지상 위로 올라오는구나  서러운 노래가 여울물처럼 나아가는구나   이팝나무들이 바람을 모아 하늘을 흔들 때마다  꽃들이 부푼다   밀려오는 꽃들의 저 너머에  얼굴들이 있구나      -전문(p. 162-163) ---------------------- * 『시현실』 2024-여름(96)호 에..

봄나물 철자법/ 김정자

봄나물 철자법     김정자    장날 노점에 앉아  봄나물 파는 할머니들  박스 쪼가리에 적어놓은 나물 이름들이  조금씩 철자법 틀려 있다.   좀 틀리면 어떤가  원래 봄은 연하다, 연해서  아무리 제대로 적어놓아도 제풀에 시들거나  하늘거리는 법이라서  어떤 글자들이라도 조금씩 받침이 틀리고  기역자가 쌍기역으로  그 햇순이 늘어난다.   참나물, 방풍나물, 원추리 같은 이름들  조금 더 봄이 깊어지면  스스로 살이 올라 꽃피울 것이다.   봄의 근처는 멀어도 봄  조금 삐뚤어지게 적어도  다들 반듯하게 읽는다.   오래된 이름들도  봄엔 생각나지 않고 몇몇은  성씨도 이름도 제멋대로 기억나지만  찬찬히 떠올려 보면 이름들마다  다 꽃이 피어 있다.     -전문(p. 149-150)    ----..

새와 상징/ 강병철

새와 상징      강병철    까치가 짧은 노래를 부른다.  당신의 모국어로,  누가 듣는가?   딱따구리가 나무 위로 올라간다.  딱딱딱  톡톡톡  클롭   클롭   클롭  퐁퐁퐁  카다 카다 카다  당신의 상징으로 듣는다.   까마귀가 카카카 울어댄다  누군가는 까악 까악으로 해석한다  당신의 모국어로   누가 듣고 설명하는가?  독수리가 울타리 너머로 날아간다  푸른 하늘 아래,  먼 하늘에 사슴 떼가 날아간다      -전문 (p. 139)  ---------------------- * 『시현실』 2024-여름(96)호 에서 * 강병철/ 2016년『시문학』으로 등단, 시집『목포에서 배틀을 읽다』영한시집『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등, 산문집『행복음자리표』『밝은음자리표』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6/ 정숙자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6      정숙자    언덕 너머 한 마을이 있었는데요. 먹을 것 입을 것 함께 사랑도 넉넉한 동네였어요. 신나는 여름, 눈부신 겨울, 너나없이 마음은 천사였고요. 언덕 너머 그곳엔 비 오는 날도 어둡지 않았습니다. 그런데요, 그런데 문득 눈 떠보니···  되돌아ᄀᆞ는 길이 떠오르질 않습니다. 꼭 좀 알려주세요. 꿈에서조차 찾을 수 없는 그 동네 어, 어, 어귀만 알아도 좋겠습니다. (1990. 11. 20.)                책에 날아와 앉은, 피리어드 10호만 한 날벌레  몸 자체에 점성이 있는가 보다, 훅    훅훅   입김을 세게 불어도 좀체 떠나지 않는다   졌다, 페이지를 넘기지 못한 채 읽기도 뚝.  더는 볼때기 부풀려 바람을 쏘지도 않고   기다린다, ..

한분순_ 서정의 포옹, 바람(전문)/ 바람에게 반하다 : 한분순

바람에게 반하다      한분순    한     올  손에 쥐고  가만히  들여다본다  풀내, 꽃내가 섞여  머리가 말갛다  그 속에  숨을 포개며  별에 오른 꽃 나비    -전문-   ♣ 서정의 포옹, 바람(전문)_ 한분순/ 시조시인  바람은 투명한 연애편지와 같다. 시인이라면 바람에게 반한다. 바람의 형식은 자유이며 그 내용은 초월이다. 평화롭게 다정하며 쟁투만큼 서슬 있다. 무형이므로 허무처럼 여겨지되 어디에나 깃들어 충만하다. 그것은 서정의 질감이다.  작가에게 있어서 낱말은 군대가 된다. 인쇄된 검은 활자는 신의 그림자처럼 놓여 있다. 오늘날 문학에서 현대성은 시간 개념이 아닌 공간 속성을 가리킨다. 바람은 야생 풍경을 넘어서 대도시를 휘감으며 속속들이 구획을 점령하므로, 그 자체가 현대적이다..

연인들은 혁명을 잊는다/ 한분순

연인들은 혁명을 잊는다      한분순    나비의 휘파람이  우울을 관통하며,   신비와 포옹 나눠  기쁨에 초대한다   바람은 서정의 질감  투명한 연애 편지   별들을 포식한 뒤,  혁명 잊은 연인들   꽃들만 폭주하듯  반역처럼 으르렁대   립스틱, 미사일 닮아  통속을 구원한다     -전문(p. 92)   ---------------------- * 『월간문학』 2024-6월(664)호 에서 * 한분순/ 197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부문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