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점에서
-신기료 장수에게
정대구
종점에서 우리는 또 걸어야 한다
돌부리를 걷어차고
진흙벌을 짓이기면서
우리는 또 걸어야 한다.
종점에서 헤지고
망가진 신을 다시 깁는다
신기료 장수는 새 신은 받지 않고
헌 신은 결코 버리지 않는다.
너덜너덜한 헌 신만을 받아서
새것보다 더 튼튼한 신으로
고쳐 놓는다.
그의 할망구는 벌써 죽었지만
헌 마누라를 얻어서
새 마누라처럼 길들여 살듯이
그는 너덜너덜한 헌 신만을 받아서
우선 무릎 위에 올려 놓고
정성스레 어루만진다.
먼지를 솔질해 털고
대담하게 도려내기도 하고
세심하게 꼬매기도 하고
마지막으로 왁스를 찍어 바르고
후후 입김을 불어가며
광까지 낸다.
보람까지 불어 넣는다.
이렇게 해서 몇 푼씩 모은 돈으로
그는 그의 두 아들에게
새 신을 신겨 대학까지 보냈다.
나는 그가 기워준 신을 신고
발을 굴러 본다
땅이 울리고 흙덩이가 부서지면 부서졌지
구두는 튼튼하다.
이 튼튼한 정신을 딛고
우리는 종점에서 또 일어나야 한다
쓰러지지 않고 시작해야 한다.
그의 곧은 바늘과
질긴 실을 생각하며
창조주 같은 그의 따뜻한 손을 생각하며
그의 대담한 칼질을 생각하며.
-전문, 1985. 3. 2. 동아일보 10면 (東亞詩壇/ 그림 · 李漢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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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성 문인 보고서 1 『시인 정대구』 2021. 12. 16. <화성시 시립도서관> 발행 (비매품)
* 정대구/ 1936년 경기 화성 출생, 1972년 ⟪대한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겨울기도』『남촌에 전화를 걸며』외 다수, 산문집『녹색 평화』『구선생의 평화주의』, 저서『김삿갓 연구』『김수영 연구』등, 영산대학교(경남) 교수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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