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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외 1편/ 윤성관

고백 외 1편      윤성관    빵점 시험지를 부모님께 보여주지 않고 찢어버린 죄  곤충채집 한다고 잠자리를 잡은 죄  소풍 갔을 때 삼색 김밥을 혼자 먹은 죄  누렁이를 동네 아저끼들에게 주라는 아버지 말을 고분고분 따른 죄  공부하다가 코피가 나면 기분 좋아 웃은 죄  수업거부 투쟁할 때 친구를 꼬드겨 설악산으로 놀러간 죄  다짜고짜 헤어지자는 말로 한 여인을 울린 죄  아이들에게 하고 싶은 것 하며 살라고 얘기하지 않은 죄  2년만 더 살고 싶다는 아버지 앞에서 소리 내어 울지 못한 죄  이리저리 눈치 보다가 똑바로 서 있는 법을 잊어버린 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내 집 새는 곳만 살펴본 죄  얻어 마신 술이 사 준 술보다 많은 죄   고해성사하면  다 용서받을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죄    ..

아버지 생각/ 윤성관

아버지 생각      윤성관    보름달에 취해 헛발 디뎠나, 세상이 무서워 숨고 싶었나, 입술 꼭 다문 호박꽃 안에 밤새 나자빠져 있던 풍뎅이는 내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오고   뒤주 바닥을 긁는 바가지 소리,  호박꽃이 핀 시간은 짧았다     -전문-   해설> 한 문장: 풍뎅이로 비유된 아버지는 호박꽃 안에서 단정하게 앉아 있거나 누워 있지 않고 '나자빠져' 있다. 나자빠져 있다는 형상화는 생경한 이미지를 생성하면서 시의 질적 수준을 끌어올리는 구실을 한다. 그 표현 속에는 타락한 듯 자신을 내던져버린 사내의 이미지가 짙게 함의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아버지는 늘 아들인 "내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오고" 만다. 어머니는 아들을 앞세워 남편의 외유를 차단하고자 노력했을 것이다.  제2연에서 "..

틈 외 1편/ 송은숙

틈 외 1편      송은숙    공원의 소로를 따라 심어진 호랑가시나무  빽빽한 울타리 사이에는 군데군데 틈이 있다  꼭 나무 한 그루 빠진 자리다 벌어진 잇새처럼,   잇새로는 스,스,스,스 발음이 새 나가고  나무 틈으로는 마주 오던 사람이 주춤거리더니 몸을 비켜 빠져나간다  어깨를 부딪힐 일 없이 삶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니   나는 틈으로 사라지는 새를 본 적이 있다  깃털 하나와 명랑한 울음 혹은 노래만 남았다  이 겨울에 저리 밝게 울 수 있다니   회개한 거인의 정원처럼 울타리 저쪽은 이미 봄일 수도  나비 날개에 노란 물이 묻어날 수도   틈을 빠져나가는 개를 본 적도 있다  하얀 개의 뒷다리와 엉덩이와 꼬리가  이승의 나뭇가지에 걸린 연처럼 호랑가시나무 진초록 잎에 걸려 있었다   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