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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옻나무 저 혼자 붉어/ 송은숙

개옻나무 저 혼자 붉어      송은숙    지난봄 숲을 지나온 뒤 우리는 개옻나무의 덫에 걸렸다 혀 밑에 감추어 둔 맹독의 세침에 팔뚝에 붉은 물집이 잡히고 심장의 안쪽이 미친 듯이 가려워질 때 우리는 한숨을 쉬며 저주를 퍼붓고 옻의 귀는 확대경이 불씨를 모으듯 말의 씨앗을 모아 두었다   맨발의 파발꾼이 다급하게 전하는 어떤 밀서를 받았는지 개옻나무 혼자 붉다 벌린 입으로 숨겨 둔 말이 발아하고 수많은 혀가 발화發火한다 발화점을 넘은 말의 덩어리들이 개옻나무에 걸려 있다 독설의 덫에 개옻나무 온몸이 가렵다    아직 엽록에 잠겨 있는 관목 숲  금기의 신목神木인 양 아무도 다가가지 않는다 개옻나무  저 혼자 붉다  저 혼자 발화發話한다     -전문-   해설> 한 문장: 멈춰 선 시인, "개옻나무의..

책 읽는 거지, 휴가 가는 거지/ 윤석산(尹錫山)

책 읽는 거지, 휴가 가는 거지      윤석산尹錫山    1  중국의 역사상 가장 어지러운 시대의 하나로 흔히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시대를 거론하곤 한다. 시대를 이끌어나가는 뚜렷한 이념도 없이 다만 술수와 기교만 살아, 세상을 횡행하던 시대. 아침에 왕조가 일어났다가는 이내 저녁이면 망하는, 수많은 나라가 일어났다가는 사라졌던 시대. 그러므로 이때에 이르러 많은 뜻있는 사람들이 세상과 등을 지고 살았었다. 이의 대표적인 인물들이 유영劉伶 · 완적阮籍 · 혜강嵇康 · 산도山濤 · 상수尙秀 · 완함阮咸 · 왕륭王戎 등, 일컫는바 죽림칠현竹林七賢이다. 이들은 세상과 자신의 뜻이 서로 어긋나므로 세상을 버리고 살았던 인물들이다.  부귀에 연연하지 않고, 아무리 높은 권세를 지닌 사람이라고 해도 그 사람됨이 마..

에세이 한 편 2024.12.05

천지백색일색(天地白色一色) 외 1편/ 나석중

천지백색일색天地白色一色 외 1편       나석중    눈 온다 폭설이다  유언 없는 적멸의 얼굴 위에  눈은 기존을 다 바꿀 듯이 오고   저 무혈혁명의 질서 속에  누구를 미워할 수 있으랴  누굴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하늘에 계신 어머니가 오셔서  다시 나를 낳을지라도  나는 또 가난한 시인이 될 것이다   죽은 세상이 부활해야 한다고  호령호령 눈 온다     -전문(p. 58)        -------    희망    오늘은 어떤 꽃을 만날까  하늘은 개었고 마음은 설렙니다   나와 모르는 한 무리는 저쪽으로 가지만  나는 홀로 이쪽으로 가봅니다   저쪽의 풍경은 어떨지 자문하는 사이  인기척이 끊길 만한 곳에 꽃이 피었습니다   꽃은 누굴 기다리는 힘으로 핍니다  기다린다는 게 희망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