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문장의 따뜻함
구현우
따뜻한 문장 하나로 겨울을 버텼다. 북카페에서 만난 한 권의 책에 들어있던 한 문장이었다. 표지도 저자도 장르도 떠오르지 않는 책이었다. 펼치기도 미안할 정도로 실내와 어울리는 책이었다. 따뜻한 문장을 제외하면 별 볼 일 없는 책이었다. 따뜻한 문장과 같은 문장은 무수히 많은 다른 책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쉽고 간결하고 흔했으나 같은 문장이라도 따뜻한 문장은 아니었다. 그 책에서, 그 책의 어느 페이지에서만 따뜻한 문장은 따뜻하게 있었다.
페퍼민트 차에서 김이 피어올랐다. 이번 겨울이 다 지나가기도 전에 다음 겨울이 왔다. 따뜻한 문장은 풀리지 않고 내내 좋았다. 이상한 온도였다. 입에 올리거나 귀에 얹으면 이내 미지근해지곤 했다. 눈 속에서나, 따뜻한 문장이었다. 보는 게 아니고 보았던 것. 당장 여기에 따뜻한 문장은 없지만 떠난 뒤에도 안을 지켜주는 따뜻함이 있었다.
차가운 물에서도 얼음이 녹았다. 거짓말처럼. 멈춘 시계에서도 시간이 흘렀다. 거짓이 아니라는 거짓말처럼. 따뜻한 문장은 "그"와 "너"를 받아주지 않았다. 따뜻한 문장은 "나"에게도 따뜻하지 않았다. 거기에 따뜻함이 있었다. 따뜻한 문장은 과거에나 있었다. 따뜻함은 전행되지 않는다. 문장은 바뀌지 않는다. 따뜻함은 유지된다.
레코드판이 돌아간다. 끓어오르지도 식어버리지도 않으면서. 손금을 따라 흐르는 한 문장. 여름의 자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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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딩아돌하』 2019-겨울호 <신작시> 에서
* 구현우/ 서울 출생, 2014년『문학동네』신인상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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