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술의 둠스데이/ 문정영

검지 정숙자 2024. 8. 29. 01:57

 

    술의 둠스데이

 

     문정영

 

 

  매일 술을 조금씩 먹고 자랐다

  

  서른 마흔 나이 먹으면서, 좁은 이마에 띠를 두르고 달리기하면서

 

  술병 에 숨어 독작하였다

 

  어떤 것이 사라질까 두렵지 않다, 술잔에 이야기하였다

 

  폭음을 싫어한다는 말에 꽃잎이 혼자 웃었다

 

  지구의 종말은 비둘기가 먼저 알 거야

 

  뱉어놓은 술 찌꺼기를 가장 많이 먹는 짐승을 위대하니까

 

  간에서 자라는 물혹들이 가끔 물었다

 

  내가 자란 만큼 술은 사라졌는가, 아니 빙하가 녹는 속도를 묻는 게 더 빠를지 몰라

 

  불안한 공기를 뱉으며 키가 줄었다

 

  몸속에 들어와 숨쉬기 곤란한 질문이 이별이었을까

 

  저녁을 감싸고 있는 술잔들이 따듯해졌다

 

  좀 더 놓아버릴 것들을 찾아야겠다고 실언했다

 

  더는 당신이라는 말을 술병에 담지 않겠다고

 

  자정 지나 혼잣말하곤 했다

     -전문(p. 12-13)

 

감상글> 벌써 7번째 시집이라니, 부럽다. 무엇보다 시인의 "저녁을 감싸고 있는 술잔"이 오래 따뜻했으면 좋겠다. "간에서 자라는 물혹" 같은 거 키우지 말고, "짤랑짤랑 술병에 담"고 싶은 사람들만 주변에 가득했으면 좋겠다. 어쩌다 만나면 내가 "볼 수 없는 모든 빛"을 다 끌어안은 표정으로 나를 배 아프게 했으면 좋겠다. 시구로 EM 세제 만드는 법도 깨알같이 광고하는 사람이니, 그의 여름이 무지 많이 남았으면 좋겠다.    안차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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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술의 둠스데이』에서/ 2024. 8. 30. <달을쏘다> 펴냄

  * 문정영/ 전남 장흥 출생, 1997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낯선 금요일』『잉크』『그만큼』 『꽃들의 이별법』『두 번째 농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