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한 집
황경순
염낭거미 행동 개시
드디어 때가 왔어요 기나긴 방황을 마치고
처음이자 마지막 집
나만의 집을 지을 때가 왔어요
저기 살짝 접힌 벼 잎에
새하얀 거미줄, 수만 겹의 거미줄로
가장 정교한 은신처를 만들어야 해요
이제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사랑도 욕심도 먹는 것도 부질없어요
그저 완벽한 집중만이 필요해요
오직 알들의 부화를 위해 천적을 염탐하기 위해
튼튼하고 투명한 집을 지어요 지어요 지어요
정말로 때가 왔어요
한 마리 한 마리 알들이 깨어나요
나의 분신들이 깨어났어요
이제 최후의 만찬으로 가장 투명한 집이 될 시간
얘들아, 나를 투명하게 해다오
단 한 모금의 체액도 남기지 말고 내 몸을 먹어다오
진정 투명한 나의 집을 완성해 다오
장엄한 최후로,
너무나 투명한 , 투명하다 못해 흔적도 없는 집
새끼들도 모두 떠난 빈집이 완성되었어요
자식을 죽인 애비, 애미가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웃는 화면을 보며
쪽방에서 50도 육박하는 염천에 젖을 물리며 부채질하는 화면도 보며
염낭거미 한 마리가
벼 잎 한 장에 간들간들 투명한 집을 짓고 있어요
-전문-
해설> 한 문장: 염낭거미의 "마지막 집"이란 긴 식물의 잎으로 3면을 말아 만든 나뭇잎 주머니 모양의 산실을 말하는 것이다. 어미 염낭거미는 그것을 둥글게 감싼 후 한쪽에 덮어두고 새끼가 태어나기를 기다린다. 어미는 새끼가 알집 밖으로 나와 다시 탈피할 때까지 산실에서 기다렸다가 그대로 새끼들의 먹이가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나만의 집"이란 새로운 생명의 탄생과 희생적 죽음이 공존하는 장소인 셈이다. "이제 아무것도 필요없어요 사랑도 욕심도 먹는 것도 부질없어요"라는 단정적 어조는 새로운 생명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보여준다. 거미의 입장에서 사랑, 욕심, 먹는 것은 살아오면서 욕망했던 최상의 가치라 할 수 있다. 세속적 모든 욕망이 거세된 몸속에서 새끼들에 의해 완성되는 "투명한 집"이란 강력한 희생의 실재이며 비유물인 것이다. "진정 투명한 나의 집을 완성해" 달라는 간절한 희구는 이제 인간의 삶과 연결되어 우화적 성격을 띠게 된다. 끝없이 자식들을 위해 내어주는 부모의 모습은 "단 한 모금의 체액도 남기지 말고 내 몸을 먹어"달라는 어미 거미의 간절한 소망과 겹쳐지며 시적 울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새끼가 다 먹고 남은 집이란 사라진 어미의 육체이며 그것은 동시에 새끼의 육체라는 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죽음의 길과 삶의 길이 동시에 펼쳐지는 이 국면은 "장엄한 최후"이며 "진정 투명한" 집의 완성을 의미한다. 마지막 연에서 염낭거미의 습성과 인간의 두 양상을 언뜻 그리고 있는데 이는 우화적 성격의 교훈을 내포하고 있다. 부모로서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의식을 독자들에게 던져주는 것이다. (p. 시 28-29/ 론 120-121 ) <우대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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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 꽃이 새가 되는 시간』에서/ 2024. 8. 12. <문학의전당> 펴냄
* 황경순/ 경북 예천 출생, 대구에서 성장, 2006년 『미네르바』로 등단, 시집『나는 오늘, 바닷물이 되었다』 『거대한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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