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심은섭_공空과 색色의 동일성 증명(발췌)/ 어느 날/ 권현수

검지 정숙자 2024. 8. 17. 16:09

 

    어느 날

 

     권현수

 

 

  내가 버린 하루를

  공차기하는 너

 

  지나가는 바람결에

  마른 대이파리 흩날린다

 

  5월인데

    -전문-

 

  과 색의 동일성 증명/ 선어禪語의 절제와 응축(발췌)_심은섭/ 시인 · 문학평론가

  시는 문학적인 형식으로서 다양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 특징 중의 하나가 형식이나 내용을 절제된 언어와 압축된 형태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시어詩語의 여러 기능 중 하나로 지목되는 것은 함축적 의미를 지녀야 한다는 것도 일반적인 시론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시의 형식이 길어지는 경향이 있다. 그런 경향은 시류時流에 편승하는 특별한 경우이지만 형식이든 내용이든 함축이나 압축을 조건으로 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러나 권현수 시인은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응축과 함축을 기본 전제로 삼는 선시로 시의 가치를 몸소 입증하고 있다.

  선시는 꺠달음을 갖게 하는 목적을 가진다. 큰 깨달음이든 작은 깨달음이든 그 어떤 것도 조건으로 삼지 않는다. 그 깨달음은 외부에 의해 깨달음을 가져오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성으로 얻어낸 성찰이 진정한 깨달음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선시를 읽고 자신의 자각으로 얻어낸 깨달음이어야 한다. 그것은 시작품 속에 육화시켜 놓은 시인의 의도를 스스로 탐구하여 얻어내는 깨우침이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깨달음이다. 

  그렇다면 누구나 선시를 읽으면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시를 읽는다고 깨달음을 갖는 것은 아니다. 압축했거나 함축된 시어나 시행 속에 시인이 숨겨놓은 의미를 독자 스스로 파악할 때만이 가능하다. 응축이나 압축되지 않은 시, 다시 말해서 설명 형식의 시는 큰 깨달음을 주지 못한다. 함축된 시행 속에 숨어있는 의미를 독자가 애써 파악할 때 무릎을 탁 치며, '이런 내용이었구나.'라는 일순간에 엄습해 오는 순간적 깨달음이 운명까지도 바꿀 수 있는 것이다.

  위의 「어느 날」에 숨겨진 의미 역시 필요한 그 이상의 욕망에서 벗어난 '비움'이다. "내가 버린 하루를/ 공차기하는 너"라는 것에서 '나'와 '너'는 등가의 개념이다. "내가 버린 하루"는 곧 내가 버린 욕망이고, 이처럼 무익한 것으로 생각하고 버린 '나'의 욕망을 '너'는 그 욕망으로 공차기 놀이를 하고 있다. 내가 버린 욕망은 너에게도 무익한 욕망인 것으로 '나'는 '너'이고, '나의 비움'이 '너의 비움'으로 귀결된다. 따라서 「어느 날에 나타난 '나'는 '너'이다. 그러므로 권현수 시인은 '너'와 '나'를 동일한 인물로 규정함으로써 "지나가는 바람결에/ 마른 대이파리 흩날"리는 "5월"을 맞이할 수 있었다. (p. 시 40/ 론 4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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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 사학 철학』에서/ 2024-여름(77)호 <신작 소시집/ 신작시/ 시 해설> 에서

* 권현수/ 2003년 『불교문예』로 등단, 시집 『칼라차크라』 『고비사막 은하수』 『시간을 너머 여기가 거기』 

* 심은섭/ 2004년『심상』으로 시인 등단, 2006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2008년『시와세계』로 문학평론 당선, 시집

『물의 발톱』외 다수, 평론집 『한국현대시의 표정과 불온성』 외, 시론집『비대상시론』외, 편저『너를 위해 종이 되리니』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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