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가 있는 궁전
이재훈
아버지가 기타를 연주하십니다. 나는 아버지의 다리 밑에 누워 있습니다. 기타에서 떨어지는 마른 고독이 목젖을 열게 합니다. 노래를 부릅니다. 말들이 우르르 목덜미로 떨어집니다. 말들이 저 밖으로 퍼지지 못하고 등위로 차오릅니다. 나는 말 위에 떠 있고, 아버지는 저 말 속에 계십니다. 내가 뱉어놓은 검은 말 속에서 기타를 연주하십니다. 말이 진화하면 물이 된다지요. 고도로 단련된 연금술인 셈입니다. 허공에 산화되어 사라지는 말을 만들어냅니다. 그때 비로소 저는 말을 배웠습니다. 내 말은 이미 물이 되었습니다. 물 속에서 기타 소리가 들려옵니다.
아버지가 기타를 연주하신 곳은 궁전이었다고 합니다. 그 궁전의 돌계단이 너무 높았지요. 다리가 아파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곤 노래 위를 떠다녔습니다. 한 사람을 사랑했던 기억의 꽃잎들이 햇살을 받아 반짝거립니다. 검은 말들이 기타의 현을 먹고 저렇게 아름답게 치장을 하다니. 참 감동스럽습니다.
겨울이 오고 말들이 얼어붙습니다. 저는 도끼로 말들을 내려칩니다. 얼었던 말의 입이 쩍 벌어지고 피가 솟아오릅니다. 아버지, 제 말이 자꾸만 피가 됩니다. 어디선가 기타 소리가 들려옵니다. 등뒤로 솟는 피가 참 따뜻합니다.
-전문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문학동네, 2005. p. 24-25)
▶종교적 신성과 그로테스크 미학_이재훈 시의 중층적 상징체계와 발생론적 메커니즘 下 (발췌)_ 오형엽/ 문학평론가
이 시는 "아버지"라는 중심 이미지에서 출발하고 "기타" "연주"-"노래"-"궁전" 이미지 계열과 "말"-"물"- 허공" 이미지 계열로 분기하여 상호 조응과 대비의 이중적 구도를 이루면서 전개되다가 "말"-"도끼"-"피" 이미지 계열로 귀결되는 환상적 "연금술"을 전개하므로써 이재훈 시의 새로운 의미구조를 보여준다. 이 시의 의미구조를 온전히 해석하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상징성이 "나"와의 관계를 축으로 두 갈래로 분화되어 전개되면서 상호 중첩하거나 충돌하다가 하나로 수렴되는 무의식적 환상의 드라마를 추적할 필요가 있다. (p. 96)
*
시적 화자는 "아버지가 기타를 연주하"고 자신이 '아버지의 다리 밑에 누워""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제시한다. 여기서 "아버지"의 상징성은 "나"와의 관계를 축으로 상호 조응하면서 "기타"-"연주"-"노래"로 이어지는 이미지 계열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말들이 우르르 목덜미로 떨어"지는 모습은 무의식적 환상이 개입되는 장면이다. "말들"이 화자의 "등 뒤로 차오"른 이후에 "나는 말 위에 떠 있고, 아버지는 저 말 속"에 존재하며 "내가 뱉어놓은 검은 말 속에서 기타를 연주"하는 장면이 제시된다. 이 첫 번째 핵심적 환상의 상징성에 대한 해석은 작품의 의미구조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p. 96-97)
*
결국 필자는 이재훈 시의 구성원리를 '종교적 신성'이라는 원천에서 '그로테스크 미학'이라는 현상으로 전이되는 발생론적 메커니즘으로 간주하고, 그 두 가지 경로를 '이교도의 비밀'이 '어머니라는 실재'를 경유하여 '나르키소스의 오욕' 에 도달하는 명시적으로 형상화되는 경로와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의 결합'이 '아버지라는 실재'를 경유하여 '파괴의 시학'에 도달하는 은폐된 채 암시적으로 노출되는 경로로 해명했다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p. 시 96-97/ 론 96 · 96-97 · 99)
---------------------------
* 『현대시』 2024-4월(412)호 <기획 연재 · 2000년대 젊은 시인들> 에서
* 이재훈/ 시인, 강원 영월 출생, 1998년『현대시』로 등단, 시집『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외
* 오형엽/ 문학평론가, 1994년 『현대시』신인추천작품상 & 1996년 《서울신문》신춘문예 평론부문 등단, 비평집『신체와 문체』『주름과 기억』『환상과 실재』『알레고리와 숭고』 등
'잡지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오리스트/ 김안 (0) | 2024.08.07 |
---|---|
류수연_언어라는 함수를 풀다(발췌)/ 가지 : 조말선 (0) | 2024.08.07 |
독립▼/ 최백규 (0) | 2024.08.05 |
혼자 가는 먼 집▼/ 장이지 (0) | 2024.08.05 |
푸른 옹기/ 안이숲 (0) | 2024.08.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