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
조말선
한 가지 고민에 빠진 구멍이 칠흙처럼 까맣다 가지마다 검은 기호를 매달고 벌써 시작하고 있다 내가 고민하는 한 가지도 촛불처럼 일렁이며 타오르는 방향을 바꾸지 않는다 저 가지도 잉크를 머금고
가지는 가지에 매달려 있어서 도망칠 수 있고 떼쓸 수 있고 탓할 수 있고 갑자기 포기할 수도 있지만 나는 묶여 있지 않아서 도망이 성립되지 않는다
궁리하는 사람처럼 가지의 뺨이 반짝인다 커가는 기호를 애지중지하는 것 같다 밤의 열매란 은밀이고 검정이고 봉합한 흔적이 없고 신중하게 잉크방울을 떨어뜨린다
과장된 기호가 대지에 가까워진다 대지의 과오를 지적하는 두 번째 손가락 같다 여기를 파면 찾고 있던 시체가 나올 거야, 흙에 덮여 있는 발등이 가려워서 해보는 거짓말처럼 모든 가지들이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가지를 싫어하는 사람은 어떤 소스를 발라줘도 가지를 따지 않는다 가지가 세계의 표면에 부딪히도록 내버려둔다 그런다고 세계에 금이 가지 않는다
-전문-
▶언어라는 함수를 풀다_박탈에서 시작된 탈주(발췌)_ 류수연/ 문학평론가
시인이 처음 발견하는 것은 '나'와 '너'의 차이이다. 여기서 '너'로 호명되는 것은 '가지'이다. '가지'는 가지에 매달려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지만, 동시에 가장 안정적인 것이기도 하다. 시인은 동음이의어인 '가지'와 가지를 환기함으로써 오히려 그것이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속성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가지'가 아무렇지도 않게 가질 수 있는 이 안정적인 종속은 '나'에게는 처음부터 부재했다. 그리고 여기서 '나'와 '너(가지)'의 차이가 드러난다. 그러므로 '가지'와는 정반대에 놓여 있는 '나'에게는,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 어디에도 종속되지 않기 때문에 도망치는 것조차 성립될 수 없는 '박탈', 그것이 바로 시적 자아의 현재인 것이다.
*
그렇다면 '나'와 '너'로서의 '가지'는 어떤 관계 속에 놓이게 되는가? 그 어떤 접점도 없을 것 같은 두 존재가 마주치는 지점은 놀랍게도 무용성이다. 가지에 매달려 있음으로써 세계 안에 제 자리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은 '가지'의 운명은 사실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동일하기 때문이다. 지독한 호불호 사이에서 '가지'는, 자신을 반기지 않는 세계 속에 놓여 있다. 그리고 무참하게 버려지지만, 그것은 이 세계에 그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마치 그 어떤 곳에도 속하지 못해서 도망칠 수조차 없었던 '나'의 또 다른 모습인 양, 시인은 처음부터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던 것처럼 세계의 표면에 부딪혀 파괴되는 '가지'의 추락을 냉정하게 바라본다.
하지만 이것을 '투항'이나 '포기'로 읽어내기엔 아직 이르다. 오히려 그것은 자신을 둘러싼 현실에 대한 겸허한 자각이며, 한 걸음 비껴나기 위한 조심스러운 응시에 가깝다. (p. 시 130/ 론 14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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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시』 2024-4월(412)호 <현대시가 선정한 이달의 시인/ 신작시/ 작품론> 에서
* 조말선/ 199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매우 가벼운 담론』『둥근 발작』『재스민 향기는 두 개의 콧구멍을 지나서 탄생했다』
* 류수연/ 문학평론가, 2013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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