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정재훈_호모 포엣이 되기로···(발췌)/ 보도블록이 모르는 이유 : 권성훈

검지 정숙자 2024. 8. 5. 17:10

 

    보도블록이 모르는 이유

 

     권성훈

 

 

  금이 간 빗방울들이 모여드는 골목

  지층이 말로 입을 덮고 있는 보도블록

 

  고여 들면서 적요하게 번져오는 수액처럼

  그사이 젖지 않을 만큼 잦아들고

  한 번도 새기지 못한 축축한 이별을 나누어 가졌다

 

  그대로 있겠다는 응답뿐인 약속을 베어 물고

  떨이는 살점을 파고드는 틈새로 쓸어 담는다

 

  거기서 닫힌 것이 있는데 열어본 적 없는

  서로를 이어붙이며 만났던 조각난 서약이

  불안한 퍼즐같이 맞춰지며

  통행을 위해 통하는 그래서 머물지 못했던

 

  애초부터 일상을 풀어내거나 인도하지 못하는

  꿈을 나올 때 씹다 버린 껌처럼

  퉁퉁 부어오른 표지판 배치같이 일글러진 변형도

  아직 채우지 못한 상처로 아문 구상물을 붙들고 있다

 

  나란히 안쪽에서 생겨나 바깥으로 좌측도

  우측도 모르는 각도를 포갠다

      -전문-

 

 호모 포엣(Homo poet)이 되기로 마음먹은 자의 표정(발췌)_ 정재훈/ 문학평론가

  위 신작시는 도시의 익숙한 풍경을 떠올리게 하지만, 드문드문 깨지고 파인 곳이 눈에 띈다. 보행의 편의를 위해 인도에 깔린 보도블록들은 약속된 배치에 따라 꽉 짜인 퍼즐처럼도 보인다. 이미 하나의 완성된 구조를 보여주는 "퍼즐 앞에서는 어떠한 손도 움직이지 않는다. 퍼즐 조각들이 한두 조각 빠져 있거나, 아예 흩어져 있을 때(상처와 구멍이 난 상황)에만 움직일 것이다. 이렇듯 정확하게 잘 정비된 포장 도로였다면, 그 위를 지나는 발걸음 역시도 머뭇거린다거나 우회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보도블록이라는 견고한 표피가 벗겨져 생긴 틈새로 고인 크고 작은 물웅덩이라도 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그 위를 바삐 지나가려는 발걸음은 이전과는 다른 불규칙한 보폭과 임시 경로로 물웅덩이를 피해서 갈 수밖에 없다. 빼곡하게 채워진 행간에 여기저기 구멍처럼 난 '말웅덩이'는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침묵의 지층에 스며들어 사라지겠지만, 적어도 누군가의 신발 안이나 바지 밑단에 꺼림칙하고 "축축한 이별"을 나눠줬을 것이다. 비가 오지 않았을 때는 느껴보지 못한 일그러진 감정이 마치 흩어진 퍼즐 조각들처럼 불안하게 퍼져갔다.

  위 시를 읽다 보면 여전히 꺼림칙하게 마음을 맴도는 시어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꿈"이다. 이것이 누구의 꿈인지는 명확하게 드러나 있지는 않다. 하지만 "일상을 풀어내거나 인도하지 못하는" 꿈은 너무나 무기력하게 보인다. 누군가 "씹다 버린 껌처럼" 그렇게 버려진 꿈이 더는 이곳에서 유의미한 삶의 가치라든가 구심점이 될 수 없다는 현실을 마주했기에 무기력하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 이제는 보도블록에 난 구멍처럼 더욱 검고 짙게 자리잡은 '껌딱지'는 당시에나 지금이나 여전히 반복되는 "상처"에 관한 "구상물"로써 이러한 상실과 고통이 언제나 누구에게든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라는 것을 몸소 증명한다. (p. 시 218-219/ 론 226-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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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시』 2024-3월(411)호 <현대시가 선정한 이달의 시인/ 신작시/ 작품론> 에서  

  * 권성훈/ 2000『문학과의식』으로 시 부문 & 2013년 『작가세계』로 평론 부문 등단, 시집『푸른 바다 가재의 전화를 받다』『유씨 목공소』『밤은 밤을 열면서』

 * 정재훈/ 문학평론가, 2018년 《세계일보》신춘문예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