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빈 칸/ 백은선

검지 정숙자 2024. 8. 5. 02:13

 

    빈칸

 

    백은선

 

 

  청아 우리 그런 얘기 했었잖아. 시나리오 구상하려고 너와 카페에 마주앉아 죽치고 있던 날.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온통 젖어 어두워지는 창밖을 보면서. 사랑에 대해 쓰고 싶다 했지.

 

  서로 사랑에 빠지면 투명해지는 병에 걸리는 거 어때? 보통 영화 보면 사랑을 해야만 병에 안 걸리잖아. 막 나쁜 피나 랍스터 글구 렛미 뭐더라 그 일본 작가 원작 영화도 비슷한 얘기잖아. 근데 이건 반대로 사랑하면 병에 걸리는 거지. 투명해져서 만나도 모른 채 스쳐지나가겠지. 사랑하는 사람을 계속 보려면 사랑하지 않아야만 하는 거야.

 

  소녀는 같은 반 여자애를 좋아하는데 안 좋아하려고 애를 쓴다? 일부러 딴 데만 보고 말도 안 하고 그러는데 어느 날부턴가 손끝이 투명해지기 시작하는 거지. 그런 얘기를 하고 있을 때 거짓말처럼 창밖에는 무지개가 뜨고.

 

  얼음이 다 녹아버려서 미지근해진 아메리카노를 빨대로 휘휘 저으면서 청이 네 얼굴을 봤는데 문득 넌 주근깨가 몇 개나 될까 궁금해서. 항상 싫어했잖아. 다 뺐었는데 다시 생겼다고. 난 네 주근깨가 좋은데 주근깨가 없는 넌 덜 좋아하게 될까?

 

  그래서 어떻게 되냐면 말이야. 점점 투명해지다가 음, 마지막엔 뭐가 남을 것 같아? 넌 머리카락!이라고 말했고 내가 생각했던 건 눈이었는데. 마지막으로 눈을 마주치고 나서, 휘어지는 공중. 끼익 넘어지는 의자. 그런 거.

 

  알 것 같아? 청아. 마음. 무지개에 걸려 투명하게 펄럭이는.

 

  나무가 베어져 쿵 하고 넘어지는 순간. 듣기 싫은 노래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어쩐지 세상의 모든 창문이 다 반짝이는 것 같다고. 투명은 그냥 관념이라고.

     -전문(p. 208-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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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시』 2024-3월(411)호 <커버스토리/ 백은선 시인이 독자들에게 읽어주는 시 3편> 중에서

  * 백은선/ 2012년『문학과사회』로 등단, 시집『가능세계』『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장면들로 만들어진 필름』『도움받는 기분』『상자를 열지 않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