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대의 천재 문장가 이규보와의 가상 인터뷰(발췌)
- interviewee: 이규보(고려 1168-1241, 73세)
- interviewer: 김혜천(시인, 다도인문강사)
한 시대를 천재 문장가로 풍미하다 강화 길상면 징강산에 누워계신 당당하고 호방하면서도 날카로운 감각으로 시 쓰며 술 마시며 고려를 살다간 천재 시인 이규보 선생을 찾아뵈었다.
수많은 저서 중에서도 『동국이상국집』 53권은 8백 년 뒤에까지 남겨져 고려의 역사, 문화뿐 아니라 깊고 넓은 시관과 사상 그리고 고려시대의 다양한 생활상과 부조리한 사회 현상을 부끄러워하면서도 아내와 자식 생각에 노심초사하고 권력 앞에서 허리도 굽신거릴 줄 아는 치열한 삶을 살았던, 그러면서도 평범한 이웃 아저씨 같은 선생의 인간미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 김혜천: 선생께서는 차茶에 대해서도 조예가 깊으셨던 것으로 압니다.
■ 이규보: 가끔 절에 들어가면 내가 술을 좋아한다는 소문이 퍼져 스님들이 일부러 술상을 차려 내오시기도 하는데 , 내 어찌 스님의 술상을 받겠는가, 하여 시를 지어 사양했었다네. 내가 술을 좋아하나 취생몽사형 술꾼은 아니란 걸 변명하고 싶었던 게지. 그 시를 어디 한 번 보여드림세.
내가 지금 산방을 찾아온 것은
술 마시려 해서가 아닌데
올 때마다 술자리 베푸시니
얼굴이 두꺼운들 어찌 땀 안 나리
스님의 격조가 높으신 것은
오직 향기로운 차를 마시기 때문이니
몽정夢頂의 새싹을 따서
혜산惠山의 물로 달인 게 좋다지
한 사발씩 마시고
한 마디씩 나누어
점점 심오한 경지에 들어간다네
이 즐거움 참으로 맑고 담담하니
어찌 반드시 술에 취할 것 있으리
※ 『동국이상국집』 후집 권1, 고율시,「엄 선사를 찾아서」 전문
'몽정'은 중국 사천성四川省의 명산인 몽산夢山의 정상으로 거기서 재배되는 차를 으뜸으로 치곤 했거든. 그리고 혜산천惠山泉은 강소성江蘇省 무석현無錫縣 서쪽에 있는데, 다경茶經을 지은 육우陸羽가 그 물맛을 높이 평가했었지. 차는 잠을 쫓는 기능도 있었으므로 나도 차를 자주 마셨다네.
□ 김혜천: 시 쓰고 차 문화를 가르치며 살아가는 저로서는 다인茶人으로서도 대 스승을 뵙게 되어 여간 영광이 아닙니다. 글 쓰는 사람들은 사회 현상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고 어떤 역할을 해야 되겠는지요?
■ 이규보: 나는 늘 가난한 선비였으나 백성의 어려움을 안타까워하고 지방관이나 향리의 수탈을 보면서도 벌할 수 없는 무력감에 비탄했네. "저 두더지만도 못한 놈들"이라고 비분강개하기도 했고. 또한 뇌물이 통하는 사회를 부끄럽게 여겨 그를 문장으로 남기곤 했는데, 글 쓰는 사람들은 사회의 부조리를 향해 분노할 줄도 알아야 해요.
흉년이 되어 백성은 다 죽게 되어
오직 남은 것은 뼈와 가죽뿐인데
(···)
묻노니 너는 입을 얼마나 가졌길래
백성들의 고기를 탐내서 씹어 먹는가
※ 『동국이상국집』 후집 권10, 고율시,「군수 몇 사람이 뇌물을 받아」 부분
조그만 배가 가고 오는데도 뇌물이 있고 없음에 따라 느리고 빠름 앞서고 뒤처짐이 있거늘 하물며 벼슬을 다투는 마당에 있어서랴
※ 『동국이상국집』 전집 권21, 설,「배와 뇌물 이야기」 부분
□ 김혜천: 마지막으로 후학들이 간직해야 할, 한 말씀 남겨주십시오.
■ 이규보:
뜻이 진정 천지사방 밖에 있어
하늘과 땅도 얽매지 못하리라
장차 우주의 근원과 더불어
아무것도 없는 곳에 노니려는가
※ 『동국이상국집』 전집 권20, 傳,「백운거사 전기에 실린 이규보의 자찬」 전문
모름지기 문학하는 사람은 무한한 시선으로 사물을 깊이 살펴 근원을 사유하고 뜻을 높고 무량한 곳에 두어야 하며, 또한 치열하게 쓰면서도 쓴다는 생각조차 없는, 즉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무위無爲하고 자유자재自由自在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보네. 그리 당부하겠네.
□ 김혜천: 오늘 선생의 넓고도 깊은 철학이 담긴 말씀 감사히 여밉니다. 기회 주어지는 대로 또 찾아뵙겠습니다. (p. 지문 40/ 대담 5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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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 강민경 지음 『이규보 선생님, 고려시대는 살 만했습니까』(푸른역사, 2012)
- 석용운 엮음『한국 茶文化 자료집 1』(초의,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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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래시학』 2024-여름(49)호 <특집 1/ 지헌止軒 이규보 선생과의 가상인터뷰>에서
* 김혜천/ 2015년『시문학』으로 등단, 시집『첫 문장을 비문으로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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