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
地平
박형준
석유를 먹고 온몸에 수포가 잡혔다.
옴팍집에 살던 때였다.
아버지 등에 업혀 캄캄한
빈 들판을 달리고 있었다.
읍내의 병원은 멀어,
겨울바람이 수수깡 속처럼 울었다.
들판의 어디쯤에서였을까,
아버지는 나를 둥근 돌 위에 얹어놓고
목의 땀을 씻어내리고 있었다.
서른이 넘어서까지 그 풍경을
실제라고 믿고 살았다.
삶이 어렵다고 느낄 때마다
들판에 솟아 있는 흰 돌을
빈 터처럼 간직하며 견뎠다.
마흔을 앞에 두고 나는 이제 그것이,
네 환각이 만들어낸 도피처라는 것을 안다.
달빛에 바쳐진 아이라고,
끝없는 들판에서 나는
아버지를 이야기 속에 가둬
내 설화를 창조하였다.
호롱불에 위험하게 흔들리던
옴팍집 흙벽에는 석유처럼 家系가
속절없이 타올랐다.
지평을 향한 生이 만든
겨울밤의 환각.
-전문(p. 94-95)
휘민: 선생님의 작품에서 유년은 단순히 과거가 아니라, 언제나 몽상하는 자아 속에서 현재적 의미로 대영토화되곤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선생님의 작품 「地平」(『춤』, 2005. 창비)에서 고향과 유년 시절의 경험을 대하는 선생님의 자의식을 가장 강렬하게 느꼈습니다. (p. 94)
바슐라르는 상상력을 하나의 상태가 아니라 인간의 존재 그 자체로, 유년 시절을 사실 그대로의 과거가 아니라 추억이라는 몽상 속에서 이미지가 재회상되며 이상적인 삶의 원형에 근접하는 것이라 했는데 이 작품이 딱 그랬거든요. 어린 시절 "석유를 먹고 온몽에 수포가 잡"힌 아이가 "아버지의 등에 업혀 캄캄한/ 빈 들판을 달리"다가 "들판의 어디쯤에서" "나를 둥근 돌 위에 앉혀놓고/ 목의 땀을 씻너내리고 있"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풍경. 이 서늘하고도 아름다운 1연의 풍경은 그러나 지연에서 성인이 된 화자에 의해 부정됩니다. "서른이 넘어서까지 거ㅡ 풍경을/ 식제라고 믿고 살았"지만 그것이 "내 환각이 만들어낸 도피처"임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3연에서 화자는 이 풍경이 "지평을 향한 生이 만든/ 여울밤의 환각"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아버지를 이야기 속에 가둬/ 내 설화를 창조하였다"는 고백을 들려줍니다. 저는 이 작품을 자화상으로 읽었습니다. 자아를 표현 도구로 삼는 자화상이 자기 고백, 자기 부정, 자기 연민 등의 서정을 담아내는 자기방어기제의 역할을 수행한다고 할 때, 이 시는 "달빛에 바쳐진 아이"라는 자아의 상, 곧 자기 신화를 탄생시키는 과정과 유사했거든요. 달리 말해 자신의 삶에 시라는 미적 형식을 입히는 과정처럼 느껴졌습니다. 이 시의 탄생 과정에 댜힌 이야기가 웅금합니다. (p. 95-96)
박형준: 저는 바슐라르 선생님(직접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덕분에 시인이 되었어요.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될 무렵 바슐라르의 『공간의 시학』을 읽었거든요. 당선작 「가구의 힘」도 의도적으로 썼다기보다는 당선되려고 매일 '깎았던'(만들었다) 시 옆에 낙서처럼 쓴 것이었어요. 우연히 얻은 거지요. 「地平」이라는 시도 어쩌면 그냥 우연히 쓴 것일지도 몰라요. 저는 고향을 떠나 인천에서 살면서 어린 시절의 추억 하나를 실제로 믿었던 것이 있었어요. 그게 위의 시의 내용입니다. 제가 유년기를 보낼 때는 마을에 전깃불이 들어오지 않아 저녁에 호롱불을 켜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시절에 호롱불을 켜려고 병에 담아놓은 석유를 마셔서 온몸에 수포가 잡혀 아버지가 저를 밤에 업고 읍내 병원에 가려고 들판의 돌에 뉘어놓았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거든요. 그런데 성년이 되어 그 기억에 대해 아버지와 가족들에게 말한 적이 있었는데, 전혀 그런 일이 없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실망했던 적이 있습니다. 아마 지평의 돌에 뉘어진 아이, 혹은 달빛에 바쳐진 아이라는 제 자신이 만든 시적 설화가 별로 특출난 것이 없이 도시에서 사는 사람을 살 수 있게 만들어준 힘이 아니었나 여겨집니다. 시는 삶 자체는 아니잖아요. 하지만 때로는 시가 자기를 정말로 사랑할 수 있게 합니다. 그리고 그게 진짜가 아니고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임을 깨닫게 되는 그런 부정의 순간이 우리로 하여금 미래 도래할 수 있음을 믿게하는 게 아닐까요. 저는 어려울 때 이런 자기 신화를 곱씹어봅니다. (p. 9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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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딩아돌하』 2023-여름(67)호 <신작소시집/ 대담> 中
* 박형준/ 199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나는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빵 냄새를 풍기는 거울』『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있다』『춤』『생각날 때마다 울었다』『불탄 집』『줄무늬를 슬퍼하는 기린처럼』
* 휘민/ 충북 청주 출생, 200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온전히 나일 수도 당신일 수도』『생일 꽃바구니』, 동시집『기린을 만났어』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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