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흑漆黑
안숭범
병원을 지났다, 누구는 지금도 아파할 것이다, 좀처럼 하지 않는 표정을 생각해 냈다, 반쯤 내려진 제과점 셔터가 주인을 두 동강 냈다, 살아남은 빵들만 냄새로 다녀갔다, 휴대폰이 오른손으로 기어 왔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미안했으므로, 누구와는 아무 숫자도 교환하지 않았다는 게 밝혀졌다, 구름은 또 거기서 서성였다, 오늘 하루만도 수없이 이 길 저길을 오갔다, 당신도 알 것이다, 그렇게 오는 밤은 구름의 망설임을 머금는다, 버스가 멀리서 사람들로부터 버림받는다, 멀어지는 것들 사이에 남은 건, 매연이거나, 사랑이거나, 매연같은 사랑이다, 그런 식으로 침침한 채 버스와 사람은, 서울역과 우체통은, 하수도와 전선은 곧잘 닮아간다, 놀랄 일이 아니다, 그렇게 모든 불투명은 떠나기 위해 모인다, 기억을 능욕했던 매서운 문장들까지, 문장 안에 가득 찬 너의 형식까지, 단지 병원과 제과점과 버스 정류장을 지났을 뿐이다,
-전문-
▶"연습하는 마음"의 거부/ 안숭범이 '나'에게서 '타자'를 소환하는 방식(발췌) _박성준/ 시인 · 문학평론가
「칠흑」에서 "반쯤 내려진 제과점 셔터가 주인을 두 동강" 낸다고 하지만, 나는 "좀처럼 하지 않는 표정을 생각해"내고 싶다. 휴대폰을 쥐고 전화를 걸까 말까 고민하는 순간도 "휴대폰이 오른손으로 기어 왔"다고 표현한다든가, "아무 숫자도 교환하지 않았다"는 표현으로 대체되고 있다. 단지 나는 구름처럼 서성이는 주체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모든 불투명은 떠나기 위해 모"이고 있으며 화자는 모든 행위를 나의 주체성에 의해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너의 형식"에 의해 준거당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나"는 결국에는 "너"의 다른 모습이다. 나는 칠흑으로 지워져 있으며 그 어둡고 반들거리는 면에 반사당하고 있는 '모르는 나'일 뿐이다.
내가 모르는 '나'로 전락한다는 것. 그래서 나는 나에게서 협소해진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 시의 화자는 아마도 '너'를 사랑하는 방식으로 제 온몸을 구축하려는 것만 같다. "단지 병원과 제과점과 버스 정류장을 지났을 뿐"이라는 단순한 일상의 묘사조차 모두 '너'로 인해 기인한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너를 사랑하는 나'일 때만 오직 내가 잠시 인지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기억을 능욕했던 매서운 문장들"만 가득한 일상에서 나의 문장(말)은 무엇이고 그중에 너로 향한 말이 무엇인지 구분해보겠다는 심사를 통해 화자는 훼손된 나를 복권하고 너에게 가는 사랑을 구축하는 과정으로 저 자신을 증명해낸다. 그러나 "좀처럼 하지 않는 표정"이란 진짜로 내비치고 싶었던 제 얼굴에 대한 고민과 고백인 셈이다. 그러나 그 얼굴은 여전히 어두워져 있으며 자기 자신을 모두 반사해내는 칠흑의 상태일 뿐이다. 그래서 이렇게 뜨거운 감성이 침윤된 이 시의 어조가 냉소적인 이유도 어쩌면 화자의 통점을 더 부각하는 방어기제로 읽힌다. (p. 시 20/ 론 61-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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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현실』 2024-여름(96)호 <집중조명 / 자선 대표시/ 작품론> 에서
* 안숭범/ 1979년 전남 광주 출생, 2005년 계간『문학수첩』으로 등단, 시집『티티카카의 석양』『무한으로 가는 순간들』『소문과 빌런의 밤』, 시, 회화, 캘리그라피 콜라보레이션 작업으로 『당신의 얼굴』, 영화평론집『환멸의 밤과 인간의 새벽』등, 시인, 영화평론가
* 박성준/ 1986년 서울 출생, 2009년 『문학과사회』로 시 부문 & 2013년 ⟪경향신문⟫으로 평론 부문 등단, 시집『몰아 쓴 일기』『잘 모르는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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