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집에서 읽은 시

벌은 꿀 1㎏을 만들기 위해 560만 송이의 꽃을 찾아다닌다/ 권영해

검지 정숙자 2024. 1. 10. 00:59

 

<수요시포럼 동인지 창간 20년을 돌아보며> 中

 

    벌은 꿀 1㎏을 만들기 위해 560만 송이의 꽃을 찾아다닌다

 

    권영해

 

 

  '두통의 바다'에는 진통제가 '시'였다

  문학은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끊임없는 질문에 대한 인문학적 대답이다. 이런 문학이 계산 없이 그저 좋았던 시절, 그 근자감根自感이야말로 순수 그 자체였고 시를 쓰는 힘이기도 하고 짐이기도 했다.

  새 밀레니엄 초입 스무 해 동안 누군가는 어른이 되고 누군가는 철이 들었다. 꽃은 결실을 위해 스스로 내부를 단련하고 봄은 해마다 제 주장을 펄치고 떨구기를 거듭하였다.

  너무 멀리 온 것 같지만 아직 갈 길이 멀고, 어제보다 엄청나게 변한 줄 알았으나 여전히 그때의 우리로 남은 것 같기도 하다. 혹여, 피터 팬처럼 성인이 되어도 미성숙한 아이로 남아 있으려 하고, 변화를 거부하는 타성에 젖은 건 아닌지 조심스레 두려워하며······. (p. 223)

 

  벌은 꿀 1㎏을 만들기 위해 560만 송이의 꽃을 찾아다닌다는데, 과연 우리는 1g의 시를 피워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날과 곳을 헤매다녔는가?

  벌의 채밀 활동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노작勞作이지만, 창립 당시에는 수요일 저녁마다 김성춘 시인이 근무하던 무룡고 교장실에 모여 문학에 관해, 각자 준비해 온 개별 작품에 대해 열띤 토론과 논쟁, 때로는 개똥철학을 논하듯 거친 언쟁(?)과 열변을 토하기도 했다.

  우리에게는 버섯 포자처럼 멸종하지 않고 오래도록 함께할 시에 대한 실낱같은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인으로서 무모하리만치 큰 자긍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p. 224)

 

  수요시포럼 대표 동인인 김성춘 시인은 창간호 표사表辭에 "어쩌면 시는 저 논바닥에 부서져 처박혀 있는 폐허의 주춧돌일 수도 있고, 주춧돌 주변의 숨 쉬는 흙일지도 모른다. 저 삶의 절정처럼 둥글게 부풀어 오르는 왕릉이 바로 시가 아닐까?" 라고 발행의 첫 마음을 적고 있다. (p. 225)

 

  우리는 나의 삶과 시대의 삶을 다양하게 포착해 가면서 시의 영토를 넓혀 가기를 희망한다. 바다처럼 깊게 사유하면서 자유롭게 작업해 갈 것이다.

  처음의 결의와는 달리, 지은 집이 다소 초라하므로 방어진의 파도보다 더 높은 부끄러움이 얼얼하게 뺨을 때린다. 

  그러나 어쩌랴. 우리는 날마다 참신하게 태어날 것이고 날마다 시의 감동 속으로 직진해 갈 것이다. 다음에 짓는 집에서는 좀 더 넉넉한 대청마루를 담을 것을 약속드린다. 옥고를 보내줘서 초라한 집에 들이치는 바람을 가려 주신 모든 분들께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린다.

  계묘년癸卯年 여름 볕이 유난히 뜨겁다. (p. 230-231)

 2023년 8월

  말복 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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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요시 포럼 제20집 쪼개진 빨강』에서/ 2023. 11. 20. <파란> 펴냄

   * 권영해/ 1997년『현대시문학』으로 등단, 시집『유월에 대파꽃을 따다』『봄은 경력 사원』『고래에게는 터미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