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눈부신 서릿발 외 1편/ 문현미

검지 정숙자 2024. 3. 21. 02:05

 

    눈부신 서릿발 외 1편

         서대문 형무소

 

     문현미

 

 

  은하의 강을 건너온 햇살이

  낡은 벽돌 틈새까지 스며든다

 

  역사의 비밀이 기지개 켜는 시간

 

  높은 담벼락 아래 오종종한 새싹들

  제 뿌리의 완강으로 어둠을 견디며

  어김없이 눈뜨는 봄날

 

  혹한의 겨울 땅을 뜷고

  어여쁜 풀꽃들 온 세상에 가득하리니

 

  강풍이 결코 무섭지 않아서

  폭우는 더더욱 두렵지 않아서

 

  다만 목숨 걸고 지키고 싶었던

  푸르디푸른 강산이었다

 

  피맺힌 울음 알알이 박힌 하늘 아래

  울려 퍼졌던 마지막 서릿발 말씀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전문(p. 68-69)

 

   * 소천 직전 유관순 열사의 마지막 말씀

 

   -------

    낮달

 

 

  한 번뿐인 오늘과 내일이

  다음 계절의 눈부신 연두로 이어질 수 있을까

 

  나와 너, 그리고 우리의

  꽃 피어나듯 두근거리는 생이

  아지랑이 날개로 사뿐 날아오를 생이

 

  이리도 금속성의 외마디 소리를 내며

  차디찬 쇠고랑을 찬 듯

 

  차라리

  꿈이라면 좋겠다는

  영화 상영 중이라면 좋겠다는 생각

 

  어떨 때는

  사는 것이 속울음을 참고 견디며 

  서걱거리는 갈대의 손인사를 해야 한다는 것을

 

  병실 유리벽 사이

 

  엄마와 딸의 물먹은 말들 어른거리고

  저승꽃, 주름진 잎그늘 아래

 

  아르르    떠 오른 낮달 한 조각

    -전문(p. 5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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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몇 방울의 찬란』에서/ 2024. 3. 20. <황금알> 펴냄 

  * 문현미/ 부산 출생, 1998년『시와시학』으로 등단, 시집『기다림은 얼굴이 없다』『가산리 희망발전소로 오세요』『아버지의 만물상 트럭』『그날이 멀지 않다』『깊고 푸른 섬』『바람의 뼈로 현을 켜다』『사랑이 돌아오는 시간』 등, 번역서『라이너 마리아 릴케 문학선집』(1권~4권), 안톤 슈낙『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 명시칼럼『시를 사랑하는 동안 별은 빛나고』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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