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향부동暗香浮動 외 1편
강우식
환자들은 의사에게 한번 잡히면
죽어서야 풀려난다.
비뇨기과는 여섯 달에 1번
새로 다니는 신장내과는 매달마다 1번
혈액종양내과는 일 년 걸쳐 1번
진료 때마다 채혈실에 들러 피를 뺀다.
그밖에 종합검진에서 뽑는 피도 있다.
피가 아까워서 적게 뽑으려고
시도도 해 보았지만 말짱 도루묵이다.
내 병의 경과는 피검사로 끝난다. 쉽다.
피검사 차트만 볼 줄 알면 의사도 되겠네.
병을 고치기보다
점점 몸에 피가 말라서 죽겠다.
피는 내 몸의 향기다.
내가 가진 사람냄새를 풍기는 향기다.
그 향기가 사라지면 죽는다.
어젯밤 꿈에는 15,6년 사별한 아내가
그동안 홀로 살아 갸륵해선지
머언 먼 길을 암향부동으로 와서
그 향기를 내 몸에 수혈해 주고 갔다.
감격해 아내 이름을 부르며
비몽사몽으로 울다 깼다.
저승에서라도 나를 생시처럼
찾아주는 아내가 있다니
나는 정말 모처럼 그냥 흐느꼈다.
-전문(p. 97-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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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막강산寂寞江山
1.
눈에는 발이 없다.
그래서 오는 소리도
가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눈이 오는 산길을
혼자 가는 사람은
바람도 숨 쉬지 않는
적막에 취해 자기도 모르게
스르르 잠들었다가
동사자凍死者가 된다.
어머니의 자장가를 듣는
꿈을 꾸며 눈 이불을 덮고 잠든
포근한 죽음이다.
눈도 고요하고
산도 강도 적막해졌다.
2.
더는 세상 살기 싫은
사내처럼 눈이 내린다.
산 자만 끊임없이 떠든다.
죽고 싶은 사람들은
고요 잠잠할 뿐이다.
감기에 걸린 듯
눈가루 같은 약을
목구멍 속으로 털어 넣는다.
세상은 아비규환인데
죽어가는 자에게는
더 할 수 없는
적막이 날개를 펴고 깃든다.
-전문(p. 128-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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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주마간산走馬看山』에서/ 2024. 3. 20. <리토피아> 펴냄
* 강우식/ 1941년 강원도 주문진 출생, 1966년『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사행시초』(1974), 『사행시초 2』(2015), 『마추픽추』(2014), 『바이칼』(2019), 『백야』(2020), 『시학교수』(2021), 『죽마고우』(2022), 『소이부답』(2023) 등, 성균관대학교 시학교수로 정년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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