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문외
백석 (1912-1996, 84세)
무밭에 흰나비 나는 집 밤나무 머루 넝쿨 속에 키질하는 소리만이 들린다
우물가에서 까치가 자꾸 짖거니 하면
붉은 수탉이 높이 샛더미 위에 올랐다
텃밭가 재래종의 임금林檎나무에는 이제도 콩알만 한 푸른 알이 달렸고 희스므레한 꽃도 하나 둘 피어 있다
돌담 기슭에 오지항아리 독이 빛난다
-이숭원, 『백석 시, 백 편』, 태학사, 2023, 149쪽, (전문)
◈ '창의문'은 조선시대 4소문 중의 하나로, 1396년도성을 쌓을 때 북서쪽에 세운 문으로 '자하문'이라고도 한다. 돌로 쌓은 홍예 위에 정면 4칸, 측면 2칸 구조의 문루가 있다. 4대문 중 북대문인 숙정문이 항상 닫혀 있었으므로 경기도 양주 등 북쪽으로 통행하는 사람들은 이 문을 거쳐서 왕래했다.
'창의문彰義門' 뜻은 '올바른 의義를 드러내는 [彰]문門'으로, 조선 초 개국공신 정도전이 지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이름인 '자하문紫霞門'은 '자핫골의 문'이란 뜻이다. 이는 한양 천도 이후에 창의문 일대의 풍광이 마치 개성의 명승 '자하동紫霞洞'과 비슷하여 '자핫골'로 불렀던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 일대는 예로부터 많은 사람이 찾는 명승지였고, '백사실계곡'은 생태경관보존 지역으로 조선시대 별서터와 각자바위, 계곡의 도롱뇽 서식지, 능금마을 등 문화유산과 자연생태가 잘 보존되어 서울 한복판에서 서울의 옛 모습과 자연경관을 즐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지역이다.
4행의 '林檎나무'는 '능금나무'를 뜻한다. 창의문 밖 능금은 경림금京林檎이라고 하여 이 지역의 유명한 특산물로 능금이 출하되는 시기에는 전국에서 몰려든 상인들로 부암동 일대가 들썩였다고 한다. 지금은 '능금마을'이라는 마을 명칭과 몇 그루 남지 않은 능금나무만이그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백석은 일본 아오야마[靑山]학원에서 영문학을 수학한 후 1934년 귀국하여 조선일보 기자로 생활하며 서울 통의동에서 하숙을 하였는데, 통의동에서 창의문까지는 2㎞ 남짓하여 걸어서 30분 정도 거리이다. 「창의문외」는 이 시절에 쓴 시로 짐작된다.(고형진, 『백석 시의 물명고』, 고려대출판문화원, 2015, 273쪽 참조) 백석의 시대 '창의문 밖'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시의 본문은 대본 삼아 크레인 카메라로 촬영해 보자. 먼저 집 앞 '무밭'을 '흰나비'에 초점을 맞추어 한 화면에 담는데, 그 너머로는 '밤나무 머루넝쿨'이 담장 역할을 하여 사람은 보이지 않고 '키질하는 소리만이 들린다' 앵글을 '우물가'로 옮긴다. 여기에서는 까치 소리를 잘 담아내는 것이 관건이다. 굳이 까치를 보여주지 않고 소리만으로도 그 존재감을 충분히 전달할 수 있을 듯하다.
이어지는 장면의 주인공은 '샛더미'(나뭇더미) 위에 오른 '붉은 수탉'이다. 너무 위풍당당하지 않고 평온하고 심상한 모습으로, 울음소리를 내더라도 새벽을 알리는 쨍한 소리보다는 일상을 돌보는 낮은음이었으면 좋겠다. '텃밭' 가의 능금나무밭은 전경과 함께 이제 막 달리기 시작한 '콩알만한 푸른' 열매와 '희스무레한 꽃'도 클로즈업으로 담아낸다. 그리고 돌담 기슭' 옹기종기 모여있는 '오지항아리'에 반사된 빛으로 마무리한다.
평화롭고 따뜻하면서도 눈부신 한때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무렇지도 않은 듯 우리 곁을 스쳐지나가는 평범한 순간순간이 가장 빛나는 장면이다. ▩ (p. 6-8)
* 블로그 註 1: 사진-창의문(러일전쟁 종군기자 잭 런던, 1904년 경), 사진-창의문(2024. 2.)과 물 흐르는 계곡 · 능금마을 이정표 · 彰義門 현판 · 돌담 기슭 · 오지힝아리 사진과, 친필 사진 「彰義門外」는 책에서 감상 要
* 블로그 註 2: 위의 시 4행 "임금林檎나무"에서 '나무'가 책에서는 고어체 쌍받침으로 된 한 글자 <나+ㅁㄱ>입니다. 그 고어체를 만들 수 없어 부득이 '나무'라고 썼음을 양해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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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딩아돌하』 2024-봄(70)호 <우리시 다시 읽기>에서
* 박순원/ 충북 청주 출생, 2005년『서정시학』 겨울호 신인상, 시집『아무나 사랑하지 않겠다』『주먹이 운다』『그런데, 그런데』『에르고스테롤』『흰 빨래는 희게 빨고 검은 빨래 검게 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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