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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거지, 휴가 가는 거지/ 윤석산(尹錫山)

책 읽는 거지, 휴가 가는 거지      윤석산尹錫山    1  중국의 역사상 가장 어지러운 시대의 하나로 흔히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시대를 거론하곤 한다. 시대를 이끌어나가는 뚜렷한 이념도 없이 다만 술수와 기교만 살아, 세상을 횡행하던 시대. 아침에 왕조가 일어났다가는 이내 저녁이면 망하는, 수많은 나라가 일어났다가는 사라졌던 시대. 그러므로 이때에 이르러 많은 뜻있는 사람들이 세상과 등을 지고 살았었다. 이의 대표적인 인물들이 유영劉伶 · 완적阮籍 · 혜강嵇康 · 산도山濤 · 상수尙秀 · 완함阮咸 · 왕륭王戎 등, 일컫는바 죽림칠현竹林七賢이다. 이들은 세상과 자신의 뜻이 서로 어긋나므로 세상을 버리고 살았던 인물들이다.  부귀에 연연하지 않고, 아무리 높은 권세를 지닌 사람이라고 해도 그 사람됨이 마..

에세이 한 편 2024.12.05

천지백색일색(天地白色一色) 외 1편/ 나석중

천지백색일색天地白色一色 외 1편       나석중    눈 온다 폭설이다  유언 없는 적멸의 얼굴 위에  눈은 기존을 다 바꿀 듯이 오고   저 무혈혁명의 질서 속에  누구를 미워할 수 있으랴  누굴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하늘에 계신 어머니가 오셔서  다시 나를 낳을지라도  나는 또 가난한 시인이 될 것이다   죽은 세상이 부활해야 한다고  호령호령 눈 온다     -전문(p. 58)        -------    희망    오늘은 어떤 꽃을 만날까  하늘은 개었고 마음은 설렙니다   나와 모르는 한 무리는 저쪽으로 가지만  나는 홀로 이쪽으로 가봅니다   저쪽의 풍경은 어떨지 자문하는 사이  인기척이 끊길 만한 곳에 꽃이 피었습니다   꽃은 누굴 기다리는 힘으로 핍니다  기다린다는 게 희망이지..

종일 빗소리*/ 나석중

종일 빗소리*      나석중    종일 빗소리에 갇힌 몸   창문 닫아도 스며드는 물비린내  매미 울음 그치고 비구름처럼 엉기는 온갖 번뇌   내 뜻과 무관하게 태어난 몸 갈 때도  내 뜻과 무관하게 가겠지만   겨우겨우 핀 꽃들 다 지겠고  생계를 운반하는 바퀴들도 미끄러질까   무슨 의도를 묻겠다고 밖에 나간다면  낡은 지팡이 같은 몸으로는 낙상하기 십상이다   종일 몸에 갇히는 빗소리     -전문-    * 우성종일雨聲終日: 남병철南秉哲(1817~1863, 46세)의 시 「하일우음夏日偶吟」에서.   해설> 한 문장: 마치 두보의 시를 보는 듯한 처연함이 서려 있다. 두보 시에 쓸쓸히 우는 원숭이 소리가 서경의 내면화라면 "종일 몸에 갇힌 빗소리"는 내면의 서경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처연함은 몸..

눈 내리는 날 외 2편/ 이영춘

눈 내리는 날 외 2편      이영춘    이렇게 적막이 내리는 날이었다  할머니 우리 집에 와 증손자 봐 주시고 귀향하시던 날  눈길에 버스가 굴렀다  그 길로 몸져누우신 할머니,  끙, 힘찬 거동 한 번 못하시고 그 길로 떠나셨다   임종 전에 마지막으로 딱 한 번 뵈었던 그 얼굴,  수업해야 한다며 급하게 뒤돌아섰던 시간 속에서  다시 올게, 하고 내달았던 그 문지방 문턱에서  나는 평생 그 문턱에 걸려 휘청거리고 있다   입속에 동전 세 닢 노잣돈으로 삼키고 가셨다는 그 임종이  내 창자에 걸린 듯  동전은 수시로 내 목구멍에서 울컥-울컥- 숨이 멎는다  문득문득 찾아오는 할머니의 그림자 등 뒤에서  그 문지방 다시 넘지 못한 거울 뒤편에서  나는 오늘도 털 많은 짐승으로 운다      -전문(..

참회록을 쓰고 싶은 날 1/ 이영춘

참회록을 쓰고 싶은 날 1      이영춘    우울이 청동거울로 밀려온다  거울 뒤편이 보이지 않는다  거울 뒤편에 숨은 얼굴이 눈물을 흘린다  제대로 살지 못했다고  제대로 살고 있지 못하다고  성자 같은 도량도 아량도 없이  남의 등 뒤에 숨어 꼬리만 드러낸 채  꼬리 감춘 채  그 얼굴 보이지 않는다  창밖 나무 이파리들이 흔들린다  소리 없이 흔들린다  갈 곳 몰라 흐느끼는 바람 같이  고요를 물고 들새 한 마리 날아간다   내 부끄러운 얼굴은 어느 유목민의 후예인가  툰드라의 골짜기를 떠도는 바람인가  아득한 그 길 물어 내 발자국 지운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시집 표제작인 이 시편은 청동거울로 뒤편에서 눈물을 흘리는 숨은 얼굴을 향한다. '청동거울'은 아마도 「참회록」이라는..

어머니께서 담배를 태우게 된 연유/ 윤석산(尹錫山)

어머니께서 담배를 태우게 된 연유     윤석산尹錫山    1  담배가 유해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이다. 요즘은 담배를 태우는 사람보다는 피우던 담배를 끊는 사람이 더 많다. 그러나 담배를 끊어가는 추세 속에서도 젊은 여성 흡연자가 차츰 늘어나는 것은 참으로 알 수 없는 현상이기도 하다. 젊은 여성 흡연자가 늘어나는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여성은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는 종래의 인식을 깨고 그간 숨어서 피우던 여성들이 드러내 놓고 담배를 피우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여하튼 요즘 들어 여성 흡연자가 많이 눈에 띄는 것을 사실이다.  우리 어머니는 1971년생이시다. 그러니 요즘으로 보아 옛날 분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이러한 어머니께서는 아주 젊어서부터 담배를 태우셨다. 연세가 70이 지나..

에세이 한 편 2024.12.03

그림자 외 1편/ 원도이

그림자 외 1편      원도이    문득 나는 당신을 앞서기 시작한다 당신을 지나면서 점점 자라다가 커지다가 주춤주춤 물러나 줄어들기 시작한다 당신의 옆구리를 돌아 등 뒤로 숨어버린다   그때 당신을 거의 잊는다 당신도 나를 거의 잊는다 하지만 당신이 돌아보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곳에서 나는 다시 자라기 시작한다 늘어난다   나는 갑자기 두 개로 세 개로 늘어난다 당신의 어깨에 들러붙어 마치 양 갈래머리처럼 양면의 눈처럼 당신을 감시하다 세상 모르게 울기도 한다   나는 다시 마구마구 생겨난다 나와 똑같이 생긴 것들과 뗴를 지어 두리번거리다 머리통이나 몸뚱이가 서로 엉키다 몇몇의 나는 물 위에 어른거리고 징검다리를 건너고 물에 빠지고    물속 가로등을 잡고 흔들다 부서지면서 흘러간다 흘러가다 나는 피..

슬픔과 칼집/ 원도이

슬픔과 칼집      원도이    당신은 대부분 숨어 있죠 안쪽에  어디든 안쪽이어야 해요 거기는 당신이 가득해서  바람도 볕도 부를 수 없어서  바람도 볕도 찾지 않죠   집은 처음부터 컴컴했나요   당신에게 사나운 마음이 생기기 전에  당신을 꺼내서 말려야겠어요  바삭바삭한 큐벨쿠키처럼 오레오처럼 내 입속에서  당신이 비명을 지를 수 있도록  소리 지를 때마다 춤출 수 있도록   댄스댄스 도마  위에서 댄스댄스 한 몸이 되어  댄스댄스 슬픔을 잘라요  빨갛게 당근처럼  댄스댄스 양파처럼   누가 당신을 춤추게 하나요   춤을 자르죠 울음을 자르죠  무뎌지도록 당신과 거리를 두고 싶어요   댄스댄스 Bloody Mary*가 끝나면  칼 블록에 당신을 꽂아요  당신의 얼굴이 세트로 담겨 있는 집   이제..

온달전 _ 온달의 회상/ 윤석산(尹錫山)

온달전     - 온달의 회상     윤석산尹錫山    말을 안 해도 하루 종일 살 수 있었던 때가그리웠다. 나무나 냇물이나, 꽃이나 새나, 말이 없어도 우리는 서로 통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말속에 감추어진 말. 그것을 다시 파헤쳐야 하는 말. 외관을 정제한 말. 갓끈을 졸라맨 말. 말을 타고 거드럭거리는 말. 시위를 떠났다가도 다시 되돌아와 내 가슴에 박히는 말.  말을 하면 그저 말로써 끝날 수 있을 때가 그리웠다. '어무이' 하고 부르면, '오냐' 하고 가슴으로 번져오던, '얘야' 하며, 그저 '예'하고 대답할 수 있던, 사람의 말들이 그리워졌다.    -전문(p. 247)   ----------------- * 화성 문인 보고서 2 『시인 윤석산』 '고전의 현대시 변용' 에서/ 2022..

처용가_처용의 시대/ 윤석산(尹錫山)

처용가     -처용의 시대     윤석산尹錫山    매일같이 휠체어를 타고  그는 이곳에 온다.  어디에서부터 그는 오는지  가족이 누구인지  하루 세 번의 끼니를 먹는지  우리는 전혀 알지를 못한다.  다만 명상의 얼굴을 하고  그는  세상을 향해 앉아 있을 뿐이다.   지하철 계단을  무릎뿐인 다리로 기어 내려와  한 장의 빛바랜 담요,  그리고 깨어지지 않는 양재기.  그가 세상을 향해 내어놓은 것은  이것들이 전부가 된다.   지하철, 오가는 발자국에  그는  때때로 묻혀버리기도 하다가  던져주는 동전 몇 닢  그가 우리 앞에 있음이 비로소 확인되기도 한다.   잃어버린 두 다리마저도 잊어버린 듯  양재기 안으로 떨궈지는 짤랑거림을  들을 수 있는 귀마저, 그는 버린 듯.  그는 차라리  하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