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회록을 쓰고 싶은 날 1
이영춘
우울이 청동거울로 밀려온다
거울 뒤편이 보이지 않는다
거울 뒤편에 숨은 얼굴이 눈물을 흘린다
제대로 살지 못했다고
제대로 살고 있지 못하다고
성자 같은 도량도 아량도 없이
남의 등 뒤에 숨어 꼬리만 드러낸 채
꼬리 감춘 채
그 얼굴 보이지 않는다
창밖 나무 이파리들이 흔들린다
소리 없이 흔들린다
갈 곳 몰라 흐느끼는 바람 같이
고요를 물고 들새 한 마리 날아간다
내 부끄러운 얼굴은 어느 유목민의 후예인가
툰드라의 골짜기를 떠도는 바람인가
아득한 그 길 물어 내 발자국 지운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시집 표제작인 이 시편은 청동거울로 뒤편에서 눈물을 흘리는 숨은 얼굴을 향한다. '청동거울'은 아마도 「참회록」이라는 시편을 쓴 윤동주가 자신의 뒷모양을 바라본 '구리거울'에서 연상되었을 것이다. 물론 '청동거울' 뒤편의 얼굴은 '나'라는 존재의 것이다. 제대로 살지 못했고 지금도 그러하다고 되뇌는 이의 얼굴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그러한 내면의 흔들림처럼 창밖 이파리들도 흔들리고 들새 한 마리도 날아간다. 그때 "내 부끄러운 얼굴은 어느 유목민의 후예인가" 하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툰드라의 골짜기를 떠도는 바람처럼 "아득한 그 길 물어 내 발자국"을 지워가는 '나'를 기록한 것이 바로 그가 쓰고자 하는 '참회록'의 실질일 것이다.
우리는 일견 눈부시고 일견 아득한 서정시의 언어를 통해 한 시대를 가까스로 견뎌간다. 눈부심과 어둑함을 황홀하게 변증한 언어의 사원을 향해 더 나은 '나'에게로 나아가려 한다. 이영춘의 이번 시집은 이러한 자아 탐구와 성찰의 속성을 심미적으로 결실해낸 성과로서, 가장 아름다운 '나'를 찾아가는 자아 탐구와 성찰의 기품을 확연하게 보여준다. 그 안에는 평범한 삶의 세목들이 시인의 언어를 통해 얼마나 구체적이고 아름다운 존재자들로 거듭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실례로 가득하다. 모든 것은 사라져가지만 시인의 펼치는 그것을 더없이 풍요로운 기억의 자양으로 끌어 모으고 있다. 그 과정에 시인 특유의 자아 탐구와 성찰의 감각이 개입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p.시 30/ 론 114-115) <유성호/ 문학평론가 · 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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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참회록을 쓰고 싶은 날』에서/ 2024. 11. 15. <서정시학> 펴냄
* 이영춘/ 강원 봉평 출생, 1976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 『시시포스의 돌』『시간의 옆구리』『봉평 장날』『노자의 무덤을 가다』『따뜻한 편지』『오늘은 같은 길을 세 번 건넜다』『그 뼈가 아파서 울었다』외, 시선집『들풀』『오줌발, 별꽃무늬』, 번역시집『해, 저 붉은 얼굴』외, 시 해설집『시와 함께』『독자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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