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눈 내리는 날 외 2편/ 이영춘

검지 정숙자 2024. 12. 4. 02:50

 

    눈 내리는 날 외 2편

 

     이영춘

 

 

  이렇게 적막이 내리는 날이었다

  할머니 우리 집에 와 증손자 봐 주시고 귀향하시던 날

  눈길에 버스가 굴렀다

  그 길로 몸져누우신 할머니,

  끙, 힘찬 거동 한 번 못하시고 그 길로 떠나셨다

 

  임종 전에 마지막으로 딱 한 번 뵈었던 그 얼굴,

  수업해야 한다며 급하게 뒤돌아섰던 시간 속에서

  다시 올게, 하고 내달았던 그 문지방 문턱에서

  나는 평생 그 문턱에 걸려 휘청거리고 있다

 

  입속에 동전 세 닢 노잣돈으로 삼키고 가셨다는 그 임종이

  내 창자에 걸린 듯

  동전은 수시로 내 목구멍에서 울컥-울컥- 숨이 멎는다

  문득문득 찾아오는 할머니의 그림자 등 뒤에서

  그 문지방 다시 넘지 못한 거울 뒤편에서

  나는 오늘도 털 많은 짐승으로 운다

      -전문(p.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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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고社告

 

 

  먼 시골학교 초임 교사로 근무하던 내 제자의 소식이네

  윗동네까지 다 합쳐도 30호가 안 된다는 마을,

  설레는 마음으로 초임 발령장을 받아 안고

  산골길을 타박타박 접어들었다네

  아이들은 모두 15명,

  병아리같이 노란 부리로 매일매일 유리창을 두드리는 고사리 손들,

  혹여 어미닭이 어디로 떠날까 들꽃 같은 눈망울로

  초롱초롱 쌍불 켜며 내 제자 꽁무니만 따라 다녔다네

 

  더 이상 떠날 수도 없는 들꽃 같은 아이들의 목소리 닮아가던 어느 날,

  단 5명으로 줄어든 아이들 등 뒤에 등나무처럼 서서

  그래도 별들이 있다고 희망을 노래하던 날 오후,

  다시 부고장 같은 '폐교' 통지문 한 통을 받았다네

 

  햇살 가득하던 유리창에

  맨발로 맨 먼저 쏟아져 찾아들던 햇살이 몸져눕고

  솔가지 사이를 타고 흐르던 바람소리조차 귀를 닫고

  시냇물은 돌돌돌 그네들 갈 길을 재촉하였다네

 

  아이들과 내 제자는 길을 잃고 엉엉

  생나무 가지 부러지는 청솔바람처럼 울었다네

  울어도 길을 멀기만 하였다네

  꽉 막힌 강원도 산골 학교 소식 한 토막

  불빛 휘황한 아파트 솦에서

  집 떠난 가족, 먼 이국의 소식 한 토막 기다리듯 

  교문, 교훈, 다 잃은 폐교 소식 전하네,

  오늘의 농촌 소식 이 세상에 전하네

  길 잃은 아이들의 길을 다시 묻는다고

       -전문(p. 5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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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못이 된 말 

 

 

  아버지 병상에 계실 때 기둥처럼 믿은 큰 딸, 나에게 하셨을 그 말씀, "느 에미가 날 괄시하는구나! 숨 붙어 있는 것이 슬프다!" "아버지, 뭘 바라세요? 아버지가 엄마한테 얼마나 잘못했는가를 생각해 보시면 아시잖아요!" 묵묵부답, 황소같이 퀭한 눈 껌벅거리며 시린 새우등으로 돌아누우시던 병상 모서리, 모서리에 박힌 아버지의 새우등 바라보며 다시 모질게 내뱉었던 말, "아버지, 아버지 땜에 엄마 골병 든 것 아시기나 하세요?" 또 묵묵부답- 노을로 번지던 햇살이 병실 창틀을 밟고 건너오는데 건너와 아버지 고르지 못한 숨소리같이 머뭇거렸는데 아버지 그 후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이 세상을 하직하셨는데 십여 년이 지난 오늘 내 가슴속에서 복통을 일으키고 있는 나의 그 말, 그 말은 왜 아직도 병실 유리창에 걸려 서성거리고 있는지 가슴 속에 박힌 큰 대못 하나 유리알 같은 이 가을날, 쿡-쿡 하늘을 찌르고 있네. 

     -전문(p.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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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참회록을 쓰고 싶은 날』에서/ 2024. 11. 15. <서정시학> 펴냄

 * 이영춘/ 강원 봉평 출생, 1976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 『시시포스의 돌』『시간의 옆구리』『봉평 장날』『노자의 무덤을 가다』『따뜻한 편지』『오늘은 같은 길을 세 번 건넜다』『그 뼈가 아파서 울었다』외, 시선집『들풀』『오줌발, 별꽃무늬』, 번역시집『해, 저 붉은 얼굴』외, 시 해설집『시와 함께』『독자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