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그림자 외 1편/ 원도이

검지 정숙자 2024. 12. 3. 01:19

 

    그림자 외 1편

 

     원도이

 

 

  문득 나는 당신을 앞서기 시작한다 당신을 지나면서 점점 자라다가 커지다가 주춤주춤 물러나 줄어들기 시작한다 당신의 옆구리를 돌아 등 뒤로 숨어버린다

 

  그때 당신을 거의 잊는다 당신도 나를 거의 잊는다 하지만 당신이 돌아보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곳에서 나는 다시 자라기 시작한다 늘어난다

 

  나는 갑자기 두 개로 세 개로 늘어난다 당신의 어깨에 들러붙어 마치 양 갈래머리처럼 양면의 눈처럼 당신을 감시하다 세상 모르게 울기도 한다

 

  나는 다시 마구마구 생겨난다 나와 똑같이 생긴 것들과 뗴를 지어 두리번거리다 머리통이나 몸뚱이가 서로 엉키다 몇몇의 나는 물 위에 어른거리고 징검다리를 건너고 물에 빠지고 

 

  물속 가로등을 잡고 흔들다 부서지면서 흘러간다 흘러가다 나는 피어오른다 꿈틀꿈틀 한밤중에 하얀 물안개처럼 문득문득 피어오른다 문득문득 당신이 나를 보고 있다

 

  나는 내 한가운데로 걸어가야 한다

     -전문(p. 9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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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마토 파르티잔

 

 

  토마토를 얼마나 많이 던져야 하늘이 붉어질까

 

  사랑은 토마토처럼 붉어지는 것

  자주 으깨지는 것

  붉은 표정으로 익다가

  건널목 정지선에서 바라보는 노을 같은 것

 

  대체 어느 길목에서 우리의 토마토가 붉어졌을까

 

  냉장고 속에서도 토마토는 익는다

  열면 붉어지고 닫으면 컴컴해지는 우리의 서랍은 안녕한가

 

  푹 삶아 껍질을 벗겨낸 토마토처럼

  그때 우리의 여름은 몹시 붉었다

 

  지금 건널목을 지나는 열차의 표정은 왜 무심할까

 

  사랑은 좌우를 가리지 않는다

  토마토는 식탁 위의 파르티잔이야, 아니 주방의 게릴라야

  당신의 왼쪽은 왜 붉지 않은가

 

  아주 많은 날 우리는 토마토를 던지고 으깨는 데 소비했다

 

  잘 익은 저녁을 써는데 토마토의 감정이 흘러내린다

  기분에 따라 토마토는 과일이나 채소로 바뀌기도 하지만

  양상추와 브로콜리 앞에서 우리는 기꺼이 과일이 되고

  후라이팬 속에서 구워지는 채소가 될 수 있다

 

  얼룩덜룩해지다 드문드문 물크러지다

  어두워지면 게릴라처럼

 

  탁자 위에서 사라지는 토마토

     -전문(p. 7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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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토마토 파르티잔』에서/ 2024. 11. 29. <달을쏘다> 펴냄

 * 원도이(본명, 원인숙)/ 강원 횡성 출생, 2019년『시인동네』로 등단, 시집『비로소 내가 괄호 안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