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외 1편
원도이
문득 나는 당신을 앞서기 시작한다 당신을 지나면서 점점 자라다가 커지다가 주춤주춤 물러나 줄어들기 시작한다 당신의 옆구리를 돌아 등 뒤로 숨어버린다
그때 당신을 거의 잊는다 당신도 나를 거의 잊는다 하지만 당신이 돌아보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곳에서 나는 다시 자라기 시작한다 늘어난다
나는 갑자기 두 개로 세 개로 늘어난다 당신의 어깨에 들러붙어 마치 양 갈래머리처럼 양면의 눈처럼 당신을 감시하다 세상 모르게 울기도 한다
나는 다시 마구마구 생겨난다 나와 똑같이 생긴 것들과 뗴를 지어 두리번거리다 머리통이나 몸뚱이가 서로 엉키다 몇몇의 나는 물 위에 어른거리고 징검다리를 건너고 물에 빠지고
물속 가로등을 잡고 흔들다 부서지면서 흘러간다 흘러가다 나는 피어오른다 꿈틀꿈틀 한밤중에 하얀 물안개처럼 문득문득 피어오른다 문득문득 당신이 나를 보고 있다
나는 내 한가운데로 걸어가야 한다
-전문(p. 9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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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 파르티잔
토마토를 얼마나 많이 던져야 하늘이 붉어질까
사랑은 토마토처럼 붉어지는 것
자주 으깨지는 것
붉은 표정으로 익다가
건널목 정지선에서 바라보는 노을 같은 것
대체 어느 길목에서 우리의 토마토가 붉어졌을까
냉장고 속에서도 토마토는 익는다
열면 붉어지고 닫으면 컴컴해지는 우리의 서랍은 안녕한가
푹 삶아 껍질을 벗겨낸 토마토처럼
그때 우리의 여름은 몹시 붉었다
지금 건널목을 지나는 열차의 표정은 왜 무심할까
사랑은 좌우를 가리지 않는다
토마토는 식탁 위의 파르티잔이야, 아니 주방의 게릴라야
당신의 왼쪽은 왜 붉지 않은가
아주 많은 날 우리는 토마토를 던지고 으깨는 데 소비했다
잘 익은 저녁을 써는데 토마토의 감정이 흘러내린다
기분에 따라 토마토는 과일이나 채소로 바뀌기도 하지만
양상추와 브로콜리 앞에서 우리는 기꺼이 과일이 되고
후라이팬 속에서 구워지는 채소가 될 수 있다
얼룩덜룩해지다 드문드문 물크러지다
어두워지면 게릴라처럼
탁자 위에서 사라지는 토마토
-전문(p. 7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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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토마토 파르티잔』에서/ 2024. 11. 29. <달을쏘다> 펴냄
* 원도이(본명, 원인숙)/ 강원 횡성 출생, 2019년『시인동네』로 등단, 시집『비로소 내가 괄호 안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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