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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게벌레/ 윤석산(尹錫山)

집게벌레     윤석산尹錫山    집게벌레의 집게를 보면  우습지도 않다  자기 몸을 손가락으로  찍어 누를라치면  꼬리에 달린 갈라진 집게를 벌리고,  그것도 무슨 무기라고,  물려고 덤비는 모습  온몸에 힘을 주어  치켜올린 집게로 사방을  허우적거리는 모습.   집게벌레의 집게를 보면  이건 우습지 못해  애처롭기가 그지없다.  최선의 무기가 고작  꼬리에 달린 작디작은 집게인 것을.  그리하여 결정의 순간  아무러한 힘이 되지 못하는 집게   보이잖는 거대한 힘들로부터  때때로 우리는 찍혀 눌리어지고  그리하여 허우적이는  최선의 집게  결코 최선이 되지 못함을  우리는 조금도 알지 못한다.     -전문(p. 172-173)   ----------------- * 화성 문인 보고서 2 『시인 윤..

낙조/ 문효치

낙조     문효치    해에게도  붉은 치마가 있음을 알았네   저 세상  아마 끔찍이도 사랑하는 이 있는 곳  거기에 갈 때마다  붉은 치마를 입고 치장한다는 걸   갈 때는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소리 없이 사라져 버린다는 걸   해에게도  애틋한 사랑이 있음을 알았네   아름답게 단장하고  저녁마다 사랑의 나라로  가고 있음을 알았네     -전문(p. 40)    ------------------- * 시집 『칠지도七支刀』에서/ 2011. 10. 25. 펴냄  * 문효치/ 전북 군산 출생, 1966년⟪한국일보⟫ &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무령왕의 나무새』『왕인의 수염』『남내리 엽서』『계백의 칼』 등이 있으며, 『七支刀』는 10번째 시집이 된다.

1976년, 화성에 도착한 바이킹 1호는 / 송현지

1976년, 화성에 도착한 바이킹 1호는      송현지/ 문학평론가    1976년, 화성에 도착한 바이킹 1호는 사이도니아 지역을 촬영한 사진을 지구에 전송한다. 화성의 표면이 처음으로 대중에게 공개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기념비적인 의미와는 별개로 공개된 사진은 곧 논란의 중심에 놓인다. 촬영된 지역의 일부에서 사람의 얼굴이 보였기 때문이다. 화성 최초 착륙에 성공할 만큼 당시 발전된 과학기술을 증명하는 하나의 자료로 사용될 수 있었을 이 사진은 한순간 그와 완전히 반대되는 목소리들로 뒤덮인다. 이를테면 화성에 고대 이집트와 같은 문명이 있었다거나 외계 생명체가 있다는 등의 소문들. NASA는 이 사진으로 인한 음모론이 가라앉지 않자 시간 간격을 두고 해당 지역을 촬영한 사진을 공개함으로써 ..

한 줄 노트 2024.11.25

송현지_웃자란 말들(발췌)/ 혼노코 : 임지은

혼노코     임지은    외로운 날에 부릅니다  일본어를 잘 모르지만  혼노코  혼노코   여긴 혼자 와도 모릅니다  아무도 당신에게 신경을 기울이지 않는 것처럼   당신은 한국어를 잘합니까?  한국에서 태어났으니 당연하겠지만   한국어는 뜨거운 국물이 시원한 것만큼 이상합니다   여기 자리 있어요, 가  자리가 없다는 뜻도 있다는 뜻도 되니까요   그럼 여기 나 있어요, 는  내가 있기도 없기도 한 상태입니까?   그래서 왔습니다  혼노코  혼노코   자주 오면 단골이라 하던데  여긴 무인 상점이군요   혹시 CCTV를 돌려 보던 주인이  저 사람 어디서 본 것 같다고 생각할까요?   그럴 리가요  천 오늘 처음인걸요   사실 일본어를 잘 몰라도 됩니다  혼노코는 혼자 노는 코인 노래방의 줄임말이거든..

확신의 구석 외 1편/ 이정희

확신의 구석 외 1편     이정희    세상에 내 편 하나 없다고 느낄 때  구석은 얼마나 웅크리기 좋은 곳인가  구석은 모든 난감의 안식  불가항력과 자포자기를 모색하기 좋은   벽을 마주 보고 앉는다는 말은  벽도 앞이 있다는 뜻이겠지  앞을 놓고 보면 깊은 뜻 하나  싹 틔우자는 뜻일 테고  귀를 틀어막고 등지고 앉으면 슬픔 가득한  밀리고 밀린 뒤끝이란 뜻이겠지   닭장 문을 열면 닭들이 구석으로 몰리는 것은  막다른 구석도 문이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  한밤중 옥상에 나가면 흔들리는  이곳저곳에서 붉게 빛나는  저 퇴로를 자신하는 구석들   어둠이 숨겨놓은 문이 있다고 확신에 찬 구석들  흐릿한 별들의 바탕, 무표정한 하늘  너무 먼 그곳을 구석이라 여기지만  한밤에 구석을 찾지 못해 우는 ..

수심을 버티는 숨/ 이정희

수심을 버티는 숨      이정희    강물이 마른 후에 보았다  물속에 반쯤 잠긴 바위들은  그 반쯤의 무게로 제자리를 버틴다  줄다리기를 하는 양쪽 사람들  있는 힘껏 줄을 당기지만  발들은 끌려가지 않으려고 고정한다   버틴다, 몇 날을 버틴다  파도의 깨문 입술이 일그러지고  마지막 숨이 관통할 때까지 버틴다  제자리는 저마다의 중심이며  저쪽이 아닌 이쪽이라는 듯이   버티는 힘은 무엇을 넘기거나  끌어당기는 것이 아닌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견디는 것이다  미동도 없다는 말은 지극히 버티고 있다는 뜻    소용돌이 견딘 수심  아슬아슬 비켜 간 길목   얼마나 버틸지   거스를 수 없는 궤적이 덮쳐도 팽팽하게 조인다  꿈은 살아가는 것들의 숨   한순간도 포기를 포기한 적 없다     -전문-..

갤럭시 선(Galaxy Sun) 외 1편/ 김영산

Galaxy Sun 외 1편      김영산    천상별밭 한가운데마다  우주 은하 한가운데마다  은하별밭 한가운데마다   은하태양이 신처럼 자리를 잡았는데  그를 천상별밭이 휘돌아 돌며  만개한 꽃들이 되어 빛나고 있었다   은하태양은 하나가 아니라 셀 수 없이 많았다  은하태양이 천상별밭을 만들고  가꾸는 일을 다 볼 수 없지만   모든 별들이 제 주위를 돌고 돌며  별밭을 아루도록 설득하는 일이  은하태양의 일임을 나는 알게 되었다   인간이 인간을 설득하고  신이 인간을 설득하듯  침묵의 은하태양이 별을 설득하는 것이다  천상별밭이 파괴되지 않는 것은   무거운 중력만이 아니라  수십억 년 침묵의 일이라서  내 잠깐 동안 꿈으로는 알 수 없다      -전문(p. 88-89)       -----..

연서시장/ 김영산

연서시장     김영산    연신, 연신 연신내가 나를 부른다 시집 한 권이   내게 흘러 들어온다 연신내역 옆에는   연서시장, 연서를 쓰는 일이 생각난다   연서시장 좌판에서   당신을 위해 장을 보는 것이라면   이 연서를 누구에게 쓰고 있나   모든 연서는 장을 보는 마음   내게 꼼꼼히 장을 보라고   그리 이름이 지어진 것이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이번 시집의 서시 격인 「연서시장」에서 시인은 "모든 연서는 장을 보는 마음"이라고 적는다. '연신내'라는 공간적 배경은 여러 시편에서 반복해 등장한다. 시인이 혹은 시적 주체가 그곳을 자주 방문했던 곳임을 짐작할 만하다. 물론 이런 사실 관계는 중요치 않다. 오히려 김영산 시인이 내세운 '나'라는 시적 주체가 연신내라는 공간을 경험..

인천 송학동에는 홍예문이란 터널이 있다 / 김안

인천  송학동에는 홍예문이란 터널이 있다           시집 『귀신의 왕』, 「시인 에세이」에서                 김안     인천  송학동에는 홍예문이란 터널이 있다. 1908년 일본의 공병대가 만든 문으로, 산의 구멍을 뚫었다고 하여 '혈문血門'이라 불렸던 곳이다. 가파른 오르막 정상에 한 대 정도의 차가 오를 수 있는 작은 터널이다. 당시 혈문을 기준으로 일본인 조계와 조선인 거주지가 나뉘어 있었다. 최근 어떤 일을 하다가 1923년 기사 중 이와 관련된 흥미로운 이야기를 보았다. 혈문 벽에다 누군가 커다랗게 '수평사원래인기념水平社員來人記念'이라 낙서를 해놓았다는 것. '수평사水平社'는 일본의 최하층민인 부라쿠민部落民 해방운동을 위해 1922년 설립된 단체이다. 수평사의 창립선언문은 ..

한 줄 노트 2024.11.22

카르마 외 1편/ 김안

카르마 외 1편      김안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이제 여기는 낯선 방이다. 이 방이 내게 어떤 꿈을 꾸게 할까. 난 자리가 티가 난다는 말은, 부재란 윤리와 면피를 꿰매 붙인 자리라는 뜻 같구나. 침상 위에는 밤보다 긴 이불. 아버지가 누웠던 자리에는 병이 여전히 남아 홀로 앓고 있다. 여기에서 가장 익숙한 것은, 저 헐떡이는 병뿐이니 나는 스스럼없이 가서 그 위로 눕는다.   오래 앓다 햇빛 아래 선다. 단단하고 검은 돌에 부딪히는 부드럽고 하얀 물처럼 11월이 내 겨드랑이를 휘감고 명치가 저리다. 하얀 꽃잎이 중얼거리며 떨어진다. 전날 밤, 천사가 나의 방문을 지나갔는데 그가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눈치챌까 두려웠다. 그때 밤이 재빠른 손길로 나의 숨을 막았다. 순간, 내 몸속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