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어머니께서 담배를 태우게 된 연유
윤석산尹錫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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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가 유해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이다. 요즘은 담배를 태우는 사람보다는 피우던 담배를 끊는 사람이 더 많다. 그러나 담배를 끊어가는 추세 속에서도 젊은 여성 흡연자가 차츰 늘어나는 것은 참으로 알 수 없는 현상이기도 하다. 젊은 여성 흡연자가 늘어나는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여성은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는 종래의 인식을 깨고 그간 숨어서 피우던 여성들이 드러내 놓고 담배를 피우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여하튼 요즘 들어 여성 흡연자가 많이 눈에 띄는 것을 사실이다.
우리 어머니는 1971년생이시다. 그러니 요즘으로 보아 옛날 분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이러한 어머니께서는 아주 젊어서부터 담배를 태우셨다. 연세가 70이 지나셔서 오랫동안 태우시던 담배를 끊으셨지만, 나의 기억으로는 아주 오래전부터, 어머니께서는 담배를 피우셨다. 그때 어린 나는 그저 어머니는 어른이니 담배를 태우시나 보다 했을 뿐, 별 다른 생각을 하지는 않았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어린 시절이면, 어머니 역시 젊으셨다. 그러니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담배를 태우셨던 것이다. 그때 담배라는 것은 으레 어른 남자나 연세가 많은 할머니 정도나 태우는 것으로 생각함이 일반이다. 그러나 젊은 어머니는 여느 젊은 부인네들과는 다르게 담배를 즐기셨다. 그렇다고 우리 어머니께서 요즘의 담배를 피우는 여성들과도 같이 진취적이거나 개방적이시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우리의 어린 시절 살림이 넉넉하지를 못했다. 그런데도 담배를 사서 피우신 걸 보면, 담배가 지닌 중독성이 얼마나 심한 것인가를 알 수가 있다. 이런 중독의 담배를 어머니께서는 언제부터 피우게 되신 것일까. 실은 나는 이런 문제에 관해서는 관심조차도 없었었다. 다만 어머니께서는 담배를 태우는 사람이라는 생각만을 했을 뿐이다.
나이가 제법 되고, 어머니께서도 담배를 태우지 않으실 때이다. 우연한 기회에 나는 어머니께서 왜 담배를 태우게 되었는지, 그 사연을 듣게 되었다.
어린 시절 우리는 서울 신당동에서 살았다. 당시 신당동이라는 동네는 매우 컸다. 주소는 신당동인데, 그 안에 약수동, 청구동, 문화동, 유락동, 황학동 등의 많은 동네가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는 이 중에도 약수동에 살았다.
6·25 전쟁 당시 나는 4살 어린아이였다. 대부분의 서울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피난을 가지를 못했다. 북한군이 점령을 한 서울 약수동에서 9·28 서울 수복이 될 때까지 그냥 살아야만 했었다.
이렇듯 묵한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있을 때 아버지께서는 집에 계시지를 못했다. 전쟁이 나기 전 잠시 민보단이라는 우익단체에서 부위원장이라는 직책을 맡아 있었기 때문에, 내무서로부터 색출되고 또 잡혀가야 하는 대상의 1순위에 해당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한반도 남단까지 밀고 내려갔던 인민군이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세를 역전당하게 되었고, 서울 탈환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그래서 인민군이 다시 그 전선을 북으로 옮겨가기 시작하던 9월 26일, 아버지께서는 숨어 지내면서, 유엔군과 한국군이 이미 서울로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미 서울 시내가 국군의 손에 들어왔으니 안심해도 좋을 것이라고 낙관하신 아버지께서는 그 날 밤 집으로 돌아오셨다.
밤이 깊어 몇 시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어린 나의 기억으로는 한잠 막 들려는 시간인데, 어둠 속 방문이 열리며 몇 사람의 장정이 우리가 자고 있는 방 안으로 들어서며 아버지를 찾는 것이 아닌가. 갑자기 들이닥친 일이라, 아무러한 대비도 못하고 계시던 아버지께서는 그 밤 그렇게 불시에 찾아온 그들에게 붙잡혀 가게 되었다. 이때 우리 집을 급습했던 사람들은 아직 그때까지 남아 있던 내무서원들이었다.
이렇듯 잡혀가신 아버지께서는 남산 자락인 한남동 맞은편, 성터가 있는 산속으로 끌려가셨다고 한다. 같이 잡혀간 사람은 모두 다섯 사람이었다고 한다. 한밤중 밧줄로 묶어 산속으로 끌고 간 그들은 다섯 사람을 한 사람 한 사람 나무에 묶어놓고는 일컫는 바 직결 총살형을 집행했던 것이다.
아버지 기억에는 깜깜한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어보니, 아직 앳된 소년병들에게 총을 주고, 이들 소년병들에게 총을 쏘도록 했다는 것이다. 총소리가 들리고 아버지께서는 정신을 잃으셨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지만, 의식이 돌아오게 되고, 가만히 누워있으려니, 산속 적막 속 멀리 사형을 집행한 인민군들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며 가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고 한다.
총상으로 인한 통증을 참으며, 인민군들의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이를 악물고 기다리다, 아버지께서는 묶인 줄을 바위에 비벼 풀고는 피가 나는 옆구리를 손으로 막으며 힘들게 산길을 내려와 인근의 아는 사람의 집으로 들어가 몸을 의탁했다고 한다.
아직 경험이 부족한 소년병들은 고참병이 시키는 대로, 깜깜한 어둠 속에서 목표물을 향해 총질을 했고, 잡혀온 사람들은 그 무분별한 총질에 맞아 모두 죽었는데, 아버지께서만 운이 좋게 옆구리를 관통하고 잠시 의식을 잃었던 것이다. 만약 의식을 완전하게 잃지를 않아 무의식 중에라도 신음소리를 조금이라도 냈더라면, 그 소리를 향해 다시 총질을 했을 터인데, 천만다행으로 신음조차 내지 않고 얼마 동안 의식을 잃으셨던 것이다. (p. 252-254)
2
아버지께서 잡혀간 1950년 9월 26일 밤은 대부분의 인민군들이 서울 지역에서 퇴각한 시기였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내무서원들이 잔류한 인민군들을 대동하고 일컫는 바 반동분자들을 색출하여 처형을 하고 떠나고자 했던 시점이기도 했다. 바로 이러한 시점에 아버지께서 인민군들이 모두 퇴각을 했으니, 안심하시고 집으로 다시 돌아오신 것이다. 밤이 깊어지자 어딘가에 숨어 있던 이들은 동네의 호응 세력과 함께 집으로 들이닥치게 되었고, 아버지께서는 이들에게 잡혀 동네에서 가까운 남산 자락으로 끌려가시어 사형 집행을 당하셨던 것이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신 아버지께서는 그때 그 총상으로 인하여 피난살이 내내 고생을 해야만 했다. 변변한 약도 없는 시절이라 더욱 어려웠다. 어렵게 군병원에서 얻어온 항생제를 먹으며 상처를 치유해야만 했었다. 다행히 총알이 옆구리를 관통하며 내장을 건드리지 않아 총상으로 인한 상처만 아물면 되는 다행한 사항이었다.
여름과 가을을 지나 맞이한 겨울, 우리는 다시 1·4후퇴로 인하여 남쪽으로 피난을 가야만 했다. 인민군이 점령을 했던 3개월 동안의 지긋지긋했던 생활도 생활이지만, 다시 북한군이 들어오면, 아버지께서는 여지없는 총살이기 때문에, 우리는 피난을 가야만 했다.
그해 겨울은 무척이나 추웠다. 그래서 한강이 꽁꽁 얼어붙었다. 만약 한강이 얼지를 않았다면, 많은 서울 시민들이 피난을 가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한강에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다리가 있지만, 그 당시에는 오직 노량진 다리, 오늘의 한강대교 하나뿐이 없었다. 그러나 이 다리마저 인민군이 남하하는 교량이 된다는 이유로 이미 폭파를 시켜 덩그마니 끊어진 다리만 남아 있었다. 그러니 강을 건너 피난을 해야 하는데, 다리는 끊어지고 어쩔 수 없이 많은 서울 시민들은 꽝꽝 얼어버린 한강을 건어야만 했다.
우리 가족도 그렇게 피난을 했다. 깜깜한 밤중, 꽝꽝 언 한강을 건너 우리는 여러 피난민과 섞여 남으로, 남으로 내려갔다. 실상 1·4후퇴 당시에 아버지의 총상 상처는 많이 치유가 된 상태였다. 청주 인근 마을 어머니 고모부댁에 머물 때이다. 그 동네에서 어린 아이가 전염병으로 죽는 상사가 나게 된다. 그러니 이 아이 장례를 맡아 수습할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피난민이 동네에 들어와 사는 것을 곱지 않은 눈으로 보던 마을 사람들의 눈치도 있고 하여, 피난민인 아버지께서 자청해서 이 일을 맡아 수습을 하고 매장을 하는 일을 하셨다.
예로부터 상처가 있는 사람이 시신을 보게 되면, 그 상처가 덧이 난다고 한다. 전염병으로 죽은 어린 생명의 시신을 수습하고 매장까지 하신 아버지께서는 그날 이후 아물어 가던 총상이 다시 덧이 나서 퉁퉁 부어오르게 되었다. 부어오른 상처에는 고름이 가득했고, 서울에 있을 때 간신히 얻어가지고 내려온 항생제는 거의 바닥이 났고 하여, 어쩔 수 없이 항생제를 가루로 만들어 한지에 발라 심지를 만들어 상처 부위에 집어넣었다가는, 저녁이면 다시 그 한지로 된 심지를 빼고 다시 항생제를 바른 한지 심지를 넣는, 그런 치료를 했다.
그러나 상처는 좋아지지를 않고 점점 부어오르기만 하였다. 이에 어머니께서 한지로 만든 심지를 빼고, 그 상처 부위를 입으로 빨아, 피고름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이러기를 며칠을 하니 상처가 다소 차도가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피고름을 입으로 빨아냈으니, 어머니의 입은 참으로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 고모부께서 "애야 그렇게 피고름을 입으로 빠니 입이 오죽허것냐? 피고름을 뱉어내고 이 담배를 피우면 그래도 좀 나을게다." 하시며 방으로 담배 말린 것을 한 두름 밀어 넣으셨다고 한다. 어머니께서는 피고름을 입으로 빨아 제거하시고는, 고모부께서 주신 담배를 종이에 말아 피우게 되셨다고 한다. 담배가 지닌 알싸한 맛이 그래도 어머니의 그 피고름을 담으셨던 입을 다소나마 위로를 했던 모양이다. 입으로 아버지 상처의 피고름을 빨아 뱉어내시고는 피우시던 담배.
이것이 어머니로 하여금 담배를 70이 넘도록 태우게 하셨던 그 사건의 단초이다. 피고름을 빨아내고, 그 피고름의 견디기 어려운 역겨움이 아직 남아 있는 입에 담배를 말아 태우게 되면, 그래도 다소 그 느낌이 사라진다고 하셨다. 이제 막 30대 중반이 되신 젊디젊은 어머니께서 담배를 배우게 된 동기에는 이렇듯 우리의 아픈 역사가 담겨져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돌아가시고 안 계신 어머니. 연세가 높은 부모님과 어린 자식들, 그리고 총상을 입은 남편을 건사하며 피난 생활을 하셨을 어머니. 어머니의 그 담배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참으로 많고 많은 아픔과 사연이 담겨져 있었던 것이다. 어린 시절 무심코 보아오던 어머니의 담배연기. 담배연기에 서려 있던 그 힘듦도 또 아픔도 우리는 실상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 (p. 254-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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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성 문인 보고서 2 『시인 윤석산』 '전쟁, 피난 그리고 몇 편의 기억' 에서/ 2022. 9. 28. <화성시립도서관> 펴냄/ 비매품
* 윤석산尹錫山/ 1947년 서울 출생, 1967년《중앙일보》신춘문예(동시) 당선 & 1974년《경향신문》신춘문예(시) 당선, 시집 『바다 속의 램프』『온달의 꿈』『처용의 노래』『용담 가는 길』『적 · 寂』『밥나이, 잠나이』『나는 지금 운전 중』『절개지』『햇살 기지개』등, 저서『동학교조 수운 최제우』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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