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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있으면 지옥이 더 좋다/ 임성순

돈 있으면 지옥이 더 좋다 임성순 천지에 이상하고 야릇한 향기가 진동한다. 색깔은 단색 모양도 크도 향기도 하나다. 아카시아꽃처럼 예쁘고 자극적인 향기이다. 나무들이 아침부터 힘차게 기지개를 켠다. 어젯밤 잘 잤느냐 콧소리를 섞어 윙크한다. 요즈음 지옥이 돈으로 도배되었다고 한다. 인간보다 지옥의 수문장들이 더 좋아한단다. 남에게 욕먹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단다. 큰손들이 뭉치뭉치 싸들고 투자하러 간단다. 천당이 빛을 잃어버리고 지옥이 대신 밝아졌다. 천당은 심심하고 거꾸로 지옥이 활력적이다. 야심이 가득한 놀이터로 리모델링했단다. 이승에서 돈 쓰지 말고 지옥으로 가지고 가자. -전문(p. 90) ------------------------ * 『미네르바』 2023-가을(91)호 에서 * 임성순/ 20..

번진 자리를 따라가다가/ 김조민

번진 자리를 따라가다가 김조민 몰래 가져다 쓴 시간과 버린 시간의 저물녘 책갈피 하나만 덩그러니 놓인 밤 불쑥 튀어나오는 이름처럼 자꾸 펼쳐지는 페이지가 있습니다 철새들은 그림자를 두고 날아오릅니다 아무도 좌절하지 않는 나머지입니다 반짝이던 첫 문장은 낡아져 이제 이렇다 할 단어는 몇 개 없습니다만 더욱 납작한 마침표입니다 영원히 쫓기는 환영 같은 것입니다 믿을 수 없습니다 그토록 뜨겁게 불타오르던 것들 모조리 거짓말이었습니까? 아직 오지 않은 안과 밖에 대한 이야기를 남겨두었습니다 잘라내지 못한 것은 그대로 두기로 합니다 발이 시린 줄도 모르고 자꾸 뻗는 줄기처럼 늘어가는 빈 페이지에 인기척을 끼워둡니다 -전문(p. 58-59) ---------------------------- * 『미네르바』 202..

분리수거/ 최세라

분리수거 최세라 긴 장마가 시작되고 있는데 나는 담장에 등을 기댄 채 버려진 물건의 설명서를 읽는다 눈이 내리면 좋겠다 푹푹 꺼지는 발자국을 따라 일어날 수 없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어제 일을 잃었는데 다시 그런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는 믿음 같은 시리얼 상자의 성분 분석표 위에서 장마가 시작되고 있다 날씨가 나빠지는 날엔 자기소개서 뭉치를 내다버렸다 종이는 종이대로 모으고 오른손이 비닐처럼 구겨지는 날에는 왼손을 버리고 인쇄된 글자들은 먹구름이 수거해 갔다 버려진 왼손이 종이처럼 젖었다 날씨가 좋아지면 산책이라는 단어로 시작되는 시집을 사야겠다 낡은 타이어 자국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전문(p. 52) ---------------------------- * 『미네르바』 2023-가을(91)호 에서 ..

싱잉볼/ 강재남

싱잉볼 강재남 슬픈 노래는 여기까지 할게요 소리의 결정들은 흩어지기 바쁘고 다음이 없는 만남처럼 우리는 가뿐해요 작은 바람에도 소리는 파동을 만들죠 어떤 소리는 일생을 걸지 않아도 좋은 게 있어요 그 소리가 더 깊다는 걸 문득 알게 될 때 밖은 짧게 안은 동그랗게 스치듯 문지르기로 해요 공명은 힘이 센 모습으로 후렴구를 불러들이죠 가장자리는 지나치기로 합니다 자라나는 마음을 그대로 두는 게 좋겠군요 가볍게 간결하게 숨을 모아요 유연한 음률로 세상이 저물고 우리는 서로에게 흘러가고 있어요 우주로 퍼지는 음색이 보이나요 천천히 일렁이는 세상은 소리가 둥글고 납작해요 그러는 동안 어떤 꽃은 피고 또 질 거예요 희미한 음색처럼 가지를 뻗으며 점점 가지를 뻗으며 우리는 아름답지 않아서 간곡한 노래가 될 겁니다 그..

각설탕과 베개/ 김륭

각설탕과 베개 김륭 가만히 끌어안아보는 베개가 갓난아기처럼 웃는 날이 있습니다. 물속으로 들어가듯, 요양병원에 누워계신 당신의 꿈속으로 들어가는 날입니다. 나는 지금 당장 내가 우는 걸 보고 싶다고 말하려던 참입니다. 당신 없이 견뎌야 할 노후 걱정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가끔씩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씁니다. 갓난아기처럼 웃는 베개를 끌어안고 울었던 어느 밤으로부터 고아가 된 나는 한 발짝도 떠날 수 없게 되었다고 투명인간처럼 밤을 걷습니다. 당신은 이런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잠을 썰고 있습니다. 한때의 달콤했던 잠을 딱딱하게 접은 각설탕처럼 앉아 입 안 가득 달이 쑨 죽을 머금고 있습니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머니, 당신이 나의 베개가 된 것은, 나는 정말 내가 어디에 있는지 ..

깔/ 박순원

깔 박순원 깔은 깔이다 깔은 홀로 존재하며 깔깔거리지도 깔짝거리지도 않는다 깔은 깔로 존재할 뿐 고깔도 때깔도 아니다 빛깔이 깔이 되고자 하면 그 빛을 버려야 한다 깔은 아무것도 형용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는다 깔은 소리가 되어 나오면 금세 허공에 흩어져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으며 글자가 되어 나와도 아무 의미도 지니지 못하여 어느 누구도 돌아보지 않는다 그것은 칼이 소리나 글자가 되어 이 세상에 나오면 누구나 그 칼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에 쓰이는지 주의 깊게 살필 수밖에 없는 것과 사뭇 다르다 깔은 들리기는 하지만 형체가 없으며 보이기는 하지만 뜻을 알 수가 없어 빗댈 수도 견줄 수도 없다 맥락도 없고 덧붙일 것도 없다 -전문(p. 41) ---------------------------- *..

소리가 흘러가는 방향/ 고명자

소리가 흘러가는 방향 고명자 풀벌레가 쩌렁쩌렁 울어 무수히 별이 진다 갈참나무 둔덕 위 오로라는 엿볼 게 많아 손등을 꼬집어보았지만 꿈은 아니다 별의 발가락은 줄톱처럼 날카로웠다 손 내밀지 마라 가만가만 듣기만 하여라 평생 너의 머리맡을 맴돌 우주일 것이다 별은 제 몸에서 발아된 빛에 찔려가면서 비비적비비적 풀을 붙잡고 운다 누가 더 긴 울음을 지녔는지 뫼비우스의 띠처럼 뒤척이는 밤이다 바닥에 귀를 대면 돌아누워 하늘에 귀를 대면 천지간에 그림움인 듯 밤이 환하다 넝쿨덤불이 불 불 불 일어서는 폐허의 성 세입자인 나도 필경 몇 백 광년 전 별이었을 것이다 다시 몇 백 광년 잠들다 깨이면 더듬이와 다리가 길어지고 날개도 돋아있을 것이다 덤불이 사라진 곳까지 날다 겨드랑이를 쓱쓱 비벼대면 폐허의 세상이 노래..

균형 외 1편/ 성향숙

균형 외 1편 성향숙 비틀거리다 넘어지고 비틀거리다 또 쓰러지고 비틀거림은 비틀비틀 전진한다 나는 너를 그렇게 배웠어 너도 나를 그렇게 사랑했지 나의 자전은 어설프지만 태양 쪽으로 기울어 너를 훔쳐보기 위한 몸부림이야 혼자여도 괜찮아 자전의 기술은 습득한 물건처럼 내 것이 되므로 연못 위에 붉게 선 플라밍고는 한쪽 다리로 오래도록 한 곳을 응시한다 바람결에 리듬을 맞추는 노련함으로 키 큰 나무가 한 다리로 수천 년 살아가는 자세야 등 뒤에 붙어 따뜻함 즐기듯이 태양과 지구 사이 팽팽한 공기들의 저항을 다정하게 유희하지 비틀거려도 어색하지 않아 비틀거림으로 비틀비틀 언제든 다시 살아나지 -전문(p. 116-117) --------------------------------- 염소가 아니어서 다행이야 안녕하..

질주의 방식/ 성향숙

질주의 방식 성향숙 살아 있지만 살아 있음을 간과하면 불현듯 어둠은 어둠을 견인하고 나는 나를 추월해 흰 국화로 환생한 적 있다 오아시스를 덮고 내 장례식장을 장식한 적 있다 몸이 분리되어 대지와 허공으로 한없이 사이가 벌어진 적 있다 한때의 감정으로 펄럭이던 때 벚꽃이 봄을 점령하듯 겁 없이 달려드는 눈빛 살피는 일 가로수의 안녕도 없이 눈 깜짝할 사이 몸 밖을 튕겨 나온 혈액은 장송곡처럼 흘러 달을 추월하고 꽃보다 빠르게 나무를 추월하고 겨우 환생한 사막여우처럼 눈을 동그랗게 멈춘 숨을 토해낸 적 있다 목숨 건 추월엔 경계가 없다 달빛의 지붕에서 낯선 빙하의 담벼락까지 시계는 흰 벽에 꽃으로 피고 오늘을 추월한 오늘처럼 미지의 낯선 행성은 나를 맞아줄 것이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어느 순간, 시..

장례식장에서/ 김상미

장례식장에서 김상미 이곳은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는 장소 청춘도 있고, 노인도 있고, 아이도 있고, 중년도 있다 사랑했던 사람, 미워했던 사람, 아무 의미 없던 사람 부자거나 가난했던 사람, 외롭거나 인기 많았던 사람 모두가 평등하게 훌훌 떠나는 장소 이승에서의 삶을 전부 끝내고 아주 멀리, 다시는 볼 수 없는 곳으로 떠나는 장소 곳곳에서 들려오는 작은 통곡 소리 저 울음이 멎으면 시간은 또다시 우리에게 속삭이리라 이 또한 지나가리라고 남은 자의 가슴에 쓰디쓴 맛을 지독한 화상 자국을 남기든 말든 죽음은 정작 우리가 이곳에 있었다는 것도 모르리라 우리는 영정사진 앞에 흰 국화 한 송이 정성스레 바치며 잘 가시게, 잘 가시게, 명복을 빈다 그러곤 아직 살아남은 우리 자신을 붙들고 일어나 나무와 하늘과 태양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