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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성환_암흑물질의 시, 그리고 생명의 문(발췌)/ 홀로와 창 : 장미도

홀로와 창 장미도 창의 연쇄가 쏟아지고 있다 쏟아지는 연쇄는 바깥으로부터 창을 밀어낸다 창은 바깥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안으로 침몰하고 기후는 섬광을 만든다 바깥이 멀어진다 창이 있고 당신은 홀로 투명하다 형태를 갖추려 애쓰면 얼음 조각은 무섭게 녹아내리고 정육면체 안에 있다 당신은 정뮥면체 안에서 홀로를 잃어버리고 있다 상자를 접는다 손톱으로 모서리를 만들고 손바닥으로 면을 만진다 상자의 손길 때문에 창은 조금 더 오른쪽으로 기울고 고추에서는 오이의 맛이 토마토에서는 망고의 맛이 생긴다 당신은 식탁 대신 투명한 창을 펼치고 앉아 가만히 들여다본다 빛나는 바깥에 밀려난 안쪽이 축적되는 것을 본다 창에서 쏟아지는 풍경은 일시적이다 잘린 손들이 입구를 연다 -전문- ▶ 암흑물질의 시, 그리고 생명의 문(발췌) ..

차성환_암흑물질의 시, 그리고 생명의 문(발췌)/ 번뇌 : 나채형

번뇌 나채형 볼품없는 한 점 흙 부서지고 빚어지고 반복하는 지나온__생은 무엇이었을까 천 길 물 속으로 발길질 수 없이 했던 시간들 심연 뒤안 뜰 사이로 숨 한번 크게 쉬고 하늘을 바라보았어 거대한 붓끝의 썩은 냄새에 작은 생명들이 질식하고 밟힌 몽당연필 심지는 뿌리되어 꽃을 피웠지 -전문- ▶ 암흑물질의 시, 그리고 생명의 문(발췌) _차성환/ 시인 · 문학평론가 시「번뇌」는 생과 사를 무한히 반복하는 윤회에 놓인 존재에 대한 불교적 사유를 보여준다. 모든 생명은 죽으면 보잘것없는 한 줌 흙으로 돌아가지만 또다시 다른 생명의 옷을 입고 태어나기를 반복한다. 부서지고 빚어지기를 무한 반복하는 윤회의 고리는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굴레이다. 지금 현재의 생뿐만 아니라 기억하지 못하는 이전의 전생前生들은 도대..

김경성_이 계절의 시/ 가을이 오면 : 이태극

가을이 오면 이태극(1913~2003, 90세) 풀섶 나무 잎이 노을로 불 붙으면 드높은 창궁은 투명 속의 청자 거울 빠알간 능금알들이 가슴 가슴 안기네 이렇게 가을이 오면 마음은 돛을 달고 그 옛날 뒷들의 능금 밭에 닫는다 못 잊을 하나의 영산을 되찾아나 보련 듯 -전문- ▲ 이태극(1913~2003, 90세)/ 강원 화천 출생. 1936년 와세다대학 전문부 졸업.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50년 동덕여자초급대학 강사. 1952년 서울대학교 강사를 거쳐 이와여대에서 문학박사, 1959년 이화여대 교수 역임. 1950~1953년까지 전쟁사를 엮은 '뇌우탄막' 등 300여 편의 작품을 내놓아 피난민들에게 희망을 심어줬으며, 1955년 ⟪한국일보⟫에 「산딸기」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

안락사 외 1편/ 성향숙

안락사 외 1편 성향숙 고통을 덜어줘야 한다는 의견 분분했다 지친 호흡기에 의지해 목숨을 부지하는 늙고 주름진 아기에게 살아생전 가장 편안한 잠이 되리 잘 자라 아가야, 잘 자라 공기야, 잘 자라 쥐야, 고양이야, 바퀴벌레야, 별들아, 바람아, 꿈들아, 꽃들아, 나무야, 잘 자라 예쁜 인형아, 빨간 잠바야, 내일을 향해 가지런히 놓인 흰 운동화야, 잘 자라 세상의 온갖 소리들아, 어둠의 희망들아, 빛의 놀라움들아 -전문(p. 92) -------------------------------------------- 무중력에서 할 수 있는 일들 집안은 텅 빈 진공이야 고독이야 밥상 위로 올라오고 젓가락으로 헤집어 고독 한 알씩 입속에 넣는다 양 팔 벌려 이리저리 휘젓고 다녀도 바람조차 느껴지지 않는 큰 소리는..

고독한 잠/ 성향숙

고독한 잠 성향숙 속삭임이 늦은 잠을 공중 분해시켰다 반짝 눈 뜬 고요는 다시 다리를 펴고 잠이 하품 속으로 흘러들어 눕지만 잠들지 못하는 맹목적인 불면 작은 불빛에도 미간을 찡그리는 눈꺼풀 속으로 기억의 눈동자를 이리저리 팽창시키는 검은 구름 속 둥근 머리들 아직도 잠의 입구를 떠도는 희미한 하현달이 팔다리 꿈지럭거리다 새우등처럼 구부리고 난 문을 꼭 닫고 두꺼운 커튼을 여민다 어둠과 함부로 뒹굴고 싶은, 사라지지 않는 빛이 닫힌 눈꺼풀 위에 얹힌다 지평선 아래로 좀처럼 내려가지 않는 눈알 지상의 눈 감은 영혼을 생각한다 오래전 어둠과 한 몸이 된 무덤을 파 내려가면 그 속에 잠이 있을까? 눈을 질끈 감고 손톱 밑에 피멍이 들도록 파 내려간 어둠의 묘혈 속에 오래된 습관처럼 눕던 잠은 제 살을 뜯어 먹..

양말을 버렸어요/ 오연

양말을 버렸어요 오연 항상 돋아나 있는 엄지발톱 양말을 괴롭히는 부분은 언제나 같았어요 엄지발톱은 무뚝뚝하고 상냥하지 않아서 아무리 좋은 양말도 배겨내지 못했죠 구멍 난 양말을 신으면 온 몸의 신경들이 아래로 몰려가요 뚫린 구멍으로 온 마음이 빠져 나가고 나는 다시 새로운 걸 채워야 해요 엄마는 전구에 양말을 씌운 채 심각한 얼굴로 예민한 수술을 하셨죠 잠자리 날개 같은 뒤꿈치는 동그란 천으로 입막음을 하였지만 구멍 난 마음은 동그라미를 따라 문밖을 나섰어요 익숙하지 않은 것은 자꾸만 가려워요 나이 든 언니들이 엄지발톱은 일자로 잘라야 한다고 왜 누누이 당부하였는지, 발톱은 두꺼워지고 단단해지고 왜 등이 굽어질까요 안으로 안으로만 파고들려 할까요 나는 신던 양말을 계속 신어서 양말에 구멍을 내요 서랍을 ..

너에게 가는 속도/ 이온겸

너에게 가는 속도      이온겸    어둠의 틈에서 비집고 나온다  빛나는 별무리 속으로 스며드는  초침이 귓속으로 밀려온다   공중에서 흩날리다 부서지는 모래알 같은  바닥의 흔적을 읽다 탑이 된 돌멩이 같은  몇천 겁의 계절을 지나 더 단단해지는 바위 같은  밤을 지나   새벽이슬을 먹을 때  재촉하지만  천천히 오라는 말,   너에게만 보이는 바람 되어  불어가고 있는     -전문-    ♣ 추천의 말  이온겸, 이 분을 시단의 새 식구로 추천한다.이 분은 오랜 기간 시와 함께하며 살아왔다. 읽고, 감상하고, 쓰기의 연속이 이 분의 삶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이온겸의 시는 아름다운 서정성이 빛난다. 단순한 듯하지만 복잡하고 진지한 내면의 세계를 새로운 모형으로 변형시키는 솜씨가 돋보인다. ..

와아! 외 1편/ 곽애리

와아! 외 1편 곽애리 입 다문 아기의 윗입술은 봉우리 아랫입술은 수평선 오호, 세상에, 아기의 입에서는 별들이 쏟아지고 흙이 아직 묻지 않은 작은 발로 걸음마를 시작하는, 와아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서 커튼을 보며, 와아, 담장 넘어가는 줄무늬 다람쥐를 보고도 와아, 와아 계란 노른자가 밥 위에 미끄러져도 와아, 아기가 토해놓은 별들을 치마 폭에 주워 담으며 나도 그만, 와아, 와··· 세상이 온통 와아 천지인데 나는 잃어버린 느낌표 오래 감겨 있던 눈, 오래 닫혀있던 가슴에 아기 천사가 뿌려 놓은 초록 별 한 무더기 -전문(p. 70-71) ---------------------------------------------------- 주머니 속에 당신을 펼치는 날 나는 당신을 접을 수도 펼 수도 입맞춤..

절창(絶唱)/ 곽애리

절창絶唱 곽애리 화장도 특별한 의상도 예쁠 것도 멋질 것도 아무렇지도 않은 무대 위의 두 여인 열악한 스테레오에서 노래가 흘러나오자 그녀들의 벌린 팔이 나팔꽃 줄기 되어 허공에 꼬였다 풀어지고 입가에 꽃이 폈다 사그라진다 휘청이다 힘줄 세운 그녀들의 다리 사이로 관객들은 재를 넘고 강을 건너 어느 뫼를 넘어갔다 오는 건지 꾸미지 않은 옷매무새 분칠하지 않은 얼굴은, 바람난 이웃집 아줌마 처녀에게 남편 빼앗긴 내 엄마 폐결핵으로 시집 못 간 사촌 언니 유부남 사랑하다 자살한 동창생 무대 위에 춤추는 내 아는 이 한바탕 혼백을 뒤집는 사람아 춤에도 절창이 있다던데 울음조차 멍이 된 정지된 숨소리 몸의 시가詩歌여 -전문- 해설> 한 문장: 시 「절창」은 한마디로 '몸시'라고 불러도 좋을 듯하다. 시와 몸이 하..

포스트모던 생태학에 대한 문답(부분)/ 박동억

포스트모던 생태학에 대한 문답(부분) 박동억 1. 결론을 상정하지 않은 생태주의 1991년 9월 26일 미국 애리조나주의 투손 사막에서 바이오스피어(Biosphere 2)라고 불리는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이 프로젝트의 목표는 인류가 다른 행성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외부 환경과 완전히 차단된 독립된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프로젝트의 이름은 지구가 곧 첫 번째로 성공한 바이오스피어라면 그들의 실험이 두 번째로 독립한 바이오스피어를 창조해 내리라는 기대를 표현한 것이었다. 지질학자와 생물학자들이 100미터 운동장 남짓한 규모의 밀폐 공간을 구축한 이후 150여 종의 동식물을 다섯 개의 구역(사막, 대양, 열대우림, 사바나, 습지)으로 나누어 살아가게 했다. 이 생명체들과 함께 남녀 넷씩 총 여덟 명..

한 줄 노트 2023.1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