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에세이>
삼학년
박성우
미숫가루를 실컷 먹고 싶었다
부엌 찬장에서 미숫가루통 훔쳐다가
동네 우물에 부었다
사카린이랑 슈거도 몽땅 털어넣었다
두레박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미숫가루를 저었다
뺨따귀를 첨으로 맞았다
-전문-
▶♣◀ 행간마다 동화가 빼곡합니다. 글자를 모르던 나이에 그림만으로 충분했던 동화 말입니다. 우리 동네에는 마을 한가운데 우물이 있었습니다. 우물 주변에는 옥수수밭이 펼쳐져 있었고요. 달빛이 부서지는 밤에는 욱수수 잎이 저들끼리 부대끼는 소리를 냈지요. 초록의 잎들은 초록의 소리로 깊은 밤을 이야기했습니다. 알곡이 익어가는 소리가 별자리를 수놓았지요. 이렇게 동화는 책에만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우리 삶 가까이에서 함께 했던 겁니다. 그것이 아름답든 서럽든 말입니다. 어떤 시는 시인의 이름만으로 가슴 푸근해지는 것이 있더군요. 시인 박성우가 제게는 그러합니다. 누가 읽어도 쉽고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는 시를 그에게서 많이 접해서일 겁니다. 미숫가루와 사카린과 동네 우물 두레박에는 친숙한 서정이 출렁입니다. 아득한 풍경이 그리워서 서럽기도 합니다. 이러한 생명력이 꿈틀거리는 3학년의 마음을 굳이 해명하거나 분석할 필요가 있을까요. 미숫가루를 실컷 먹고 싶은 아이를 흐르는 대로 읽고 그냥 공감하면 되지 않겠는지요. (p. 시 66/ 론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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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나이테
양진기
'낮술 환영'에 들어선 목포 홍탁집
아줌마가 연분홍 홍어살을 저미고 있네
그녀의 속살도 한때는 저리 뽀얬을 거야
서비스로 애탕을 내오는 소매를 잡고
손님도 없는데 한 잔 허요
막걸리를 따자주자 넙죽 잘도 마시네
한 잔 들어가자 오래된 술친구처럼
묻지도 않은 딸 자랑에
젊은 시절 사진을 지갑에서 꺼내 보여주네
곰살궂은 친구가 뭔 띠요 누님 같은디
민증 까까?
옥신각신하다가 민증을 보여주네
또래라 생각했던 아줌마
일곱 살이나 어렸네
모진 풍파로 뿌리가 몇 번이나 흔들렸을까
근심으로 푸른 잎을 얼마나 떨구었을까
끓던 애탕이 식어 거북등이 되고 있네
오빠들, 또 오셔
활짝 웃자 눈가에 자글한 실금들
번졌다가 사라지는 둥근 나이테
-전문-
▶♣◀ 바람이나 벌레로 재해를 입은 나무가 규칙적인 나이테를 만들지 못하고 한 해에 두 개 이상 나이테를 만드는 것을 헛나이테라고 해요. 뜻밖의 재난으로 만들어진 나이테는 안팎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아요. 사람도 이와 다를 게 없어요. 얼굴에는 한 사람이 걸어온 일생이 쓰여있어요. 스스로가 원하는 일이 아닌 길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의 비애를 생각합니다. 누군들 이런 생을 원했을까요. 우리에게는 어쩌지 못하는 삶도 있습니다. 바닷가를 배경으로 한 허름한 가게에서 술잔을 건네며 주고받는 농이 막걸리처럼 익었어요. '낮술 환영'에서 만난 아주머니를 보면서 헛나이테의 속성을 그린 화자의 농에서 연민의 마음이 읽혀요. 모진 풍파에 몇 번이나 흔들렸을 뿌리를, 근심으로 떨구었을 잎으로, 사람의 나이테를 그립니다. 눈가에 자글자글한 실금이 고단함을 말해주네요. 그럼에도 엄마는 그런 것 같아요. 생의 질곡에서도 자식을 생각하면 미소가 먼저 번지는 것요. 비바람이 강해도, 생채기 난 마음에서 피가 흘러도, 엄마여서 괜찮아야 하는 것요. (p. 시 92/ 론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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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재남 시에세이 『당신에게 도착하지 못한 말』 2023. 11. 27. <달을쏘다> 펴냄
* 강재남/ 경남 통영 출생, 2010년『시문학』으로 등단, 시집『이상하고 아름다운』『아무도모르게 그늘이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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