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감* 외 1편
엄세원
한 줄기 빛이 안으로 스며들자
갇혀 있던 천오백 년의 기운이 되살아났다
순식간에 소환한 마지막 날의 동정
단 하나의 등감만이
벽돌무덤 안쪽 묘실 끝까지 지켰을 거다
불이 꺼지는 순간, 깊은 잠이 켜지고 있었을 거다
중심이 되어 내려다보는 자리
금방이라도 백제의 달을 데려와
어둠 밝히고 연꽃 문양을 키울 것만 같다
왜 하필 복숭아 모양이었을까
죽어 있는 신선은 떠올리진 않았을 거다
아니, 뼈마저도 흩어졌으니
이미 신선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왕의 무덤 건드리면 재앙을 부른다는데
그 풍문은 아직도 유효할까
왕릉을 갔다 온 날, 꿈속에서 나는 등감이 되었다
아득하게 먼 신전에서 오래 앓던 불씨 하나
기포 속으로 끈질기게 파고든다
봄의 중심에 쟁여놓은 다 타오르지 못한 몽우리 하나
몸 허투루 버리지 못한 섬세한 형이
실핏줄 타고 심장으로 모여든다
비손의 붉은 꽃송이
불꽃 일렁이며 다 타버리고서야 희뿌연 여운이
유적처럼 남아 다음 생을 기다린다
오랜 시간을 꼿꼿하게 한 자세로 견뎌온
저 빈자리는 빛이 씨앗을 심고
발아를 기다리는 포궁이다
-전문(7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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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어디에서 핼리 혜성을 볼까
달빛이 내린 대관령 감자꽃밭을 품었다
마치 은하 세계를 보듯, 저것은 어디에도 존재하는 사람과 사람,
눈들의 파종이다
점질감자와 분질감자는 고랭지에서 눈을 떴다
빛을 보면 퍼렇게 속내를 드러내는 그들
골바람이 사각지대를 휘돌 때 골짜기는
암막커튼을 치고 부드럽고 촉촉하게 붉어지기도 하는
고분자의 감정으로 지지고 볶고 졸이고
아웅다웅하는 관계로
눈이 눈을 분양하고 감자에 집중하는 중이다
푸른 점 하나 창백하게 빛난다
출입문 당기는 완자무늬 卍은, 서로를 꽉 문 눈의 눈
눈 깜빡일 때마다 주기적으로 감정이 사천억 개의 별처럼
태어났다 죽었다 반짝이기도 한다
무엇으로부터의 혁명이고 무엇으로부터의 반사일까
안과 바깥, 중앙과 구석의 세계
구석은 빛으로 가는 기다림일까
행성에서 놓쳐버린 서로의 달빛을 잠재운다
달의 둥긂에도 모남이 있어 구를 때마다
한 겹을 벗고 뭉툭한 날이 생긴다
사람을 불러들이고 사람을 밀어내는 데 걸린 수많은 시간
감자가 노릇노릇 익어가는 고지에서
기다려도 오지 않을 우리의 핼리 혜성을 기다린다
홍영과 대광의 씨감자가 피워내는 눈과 눈의 기다림
뿔이 솟아올라 감자꽃을 피웠다
한 이랑 속에서 사람의 맛이 떨어지는 시간
76년을 더 기다리면 올까 우리의 핼리 혜성
-전문(p.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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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우린, 어디에서 핼리 혜성을 볼까』 에서/ 2023. 12. 20. <상상인> 펴냄
* 엄세원/ 2021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숨, 들고나는 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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