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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성_이 계절의 시/ 눈 : 김상옥

눈      김상옥(金相沃,1920~2004, 84세)    온 세상 뜰안인 양 포근히도 고요한 날  저 하늘 푸른 속에 깊숙이 숨었다가  흰 날개 고이 펼치고 춤을 추며 나리네   헐벗은 가지에도 흐뭇이 꽃이 벌고  보리 어린 이랑 햇솜처럼 덮어주고  오는 철 새로운 봄을 불러오려 하느냐   깃드는 추녀 끝에 낙수소리 들리거든  참고 견딘 추움 헌옷처럼 벗어두고  우리네 헐린 살림을 다시 가꿔 보리라     -전문-   ▲ 김상옥(金相沃, 1913~2003, 90세)/ 시조시인, 경남 통영 출생, 1939년 『문장』에 「봉선화」가 추천되고 같은 해 ⟪동아일보⟫ 시조 공모에 「낙엽」이 당선되며 등단하였다. 전통적인 율격과 제재로 사실적 기법을 활용하여 현대 시조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시조집으로 『..

황색 점등의 시간 외 1편/ 백명희

황색 점등의 시간 외 1편 백명희 신호등의 변심을 탓하는 것은 아니다 어서 달려오라던 에메랄드빛 웃음도 이쯤에서 멈추라는 저 흐린 눈빛도 진심이다 긴 한숨 속에 지루한 빨간불을 견딜지 가슴에 비상등 켜고 이대로 액셀을 밟을지 때마다 오는 선택의 시간이 싫을 뿐이다 영원한 사랑이 없다는 것도 알고 시나브로 변하는 마음도 알지만 황색 점등의 순간에야 보이던 좁힐 수 없는 당신과 나의 거리 당신은 이미 교차로를 떠났고 정지선 앞에 나는 얼어 있다 뒤돌아보지 않던 당신의 뒷모습을 흐린 눈으로 바라보던 나 때마다 변하는 마음을 탓하는 것은 아니다 누구의 꼬리도 물지 못하고 교차로에서 자꾸만 발이 묶이는 내가 싫은 황색 점멸이다 -전문(p. 32) -------------------------------------..

기제(忌祭)/ 백명희

기제忌祭 백명희 프라이팬에 몸을 누인 너 표정이 없다 어쩌다 삶을 잃었는지 멍한 눈으로 허공만 바라봐 살이 익는지 타는지도 모른 채 뒤집힐 때만을 기다린다 언니도 생의 마지막 한 달을 꼭 저 생선처럼 누워 있었다 뇌는 죽고 심장만 살아 산소호흡기에 생을 맡겼던 시간 바늘이 온몸을 퍼렇게 쑤셔 대도 동공 풀린 눈은 움직임이 없고 때마다 뒤집개로 뒤집듯 몸을 돌려 줘야 했다 치열했던 바다의 기억을 녹이며 조용히 타들어 가는 생선 조심스레 뒤집어 상에 올린다 허망한 삶끼리 마주한 제상, 이제는 좀 편안한가요? 향대의 연기가 자꾸만 흔들린다 -전문(p. 55) 해설> 한 문장: 전통 사회를 유지하는 일 중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관혼상제와 같은 제례 의식이 아닐까 싶다. 그중에도 상례나 제례는 가슴 아픈 ..

실거리나무꽃이 피고 있다/ 변종태

실거리나무꽃이 피고 있다 변종태 1 오월에는 벽이 자란다. 벽이 벽에게로 다가가 손을 내밀고, 벽이 벽과 함께 흐르는 오월에는 꽃이 피지 않는다. 벽이 벽에 기대서서 저들끼리 사유의 도랑을 낸다. 2 세월의 흐름은 제자리를 맴도는데, 안개가 낮게 깔린 뒷골목에서 실거리나무가 노오란 웃음을 흘리며 지퍼를 내리고 있다. 3 바람이 불고 있다. 노오란 바람이 실거리나무를 스쳐와 안개꽃을 흔들고 있다. 시간은 스스로 제 무덤을 파고 있다. 그리움은 절대로 한 쌍의 무리를 짓는 일이 없다. 보도 블록 사이에서 잡초가 자라고, 서러움이 자라고, 아픔이 자란다. 4 이대로 머물 수는 없다. 이대로 떠날 수도 없다. 오월에는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죄가 되는데 모두가 떠나버린 빈 들판 노오란 실거리꽃이 피고 있다...

방바닥에 떨어진 머리칼/ 박형준

방바닥에 떨어진 머리칼 박형준 어머니는 팔순을 내다보면서부터 손바닥으로 방을 닦는다 책상 밑에서부터 시작하여 어둠침침한 침대 밑에 한쪽 손을 쭉 뻗어넣고 엎드린 채로 머리칼을 쓸어내오신다. 어머니의 머리칼은 하얗고 내 머리칼은 짧다. 그러나 정체불명의 것도 있다. 빗자루로 아무리 쓸어내도 방바닥에는 어머니와 내 것이 아닌 흔적이 떨어져 있다. 어머니는 먼지가 가득 묻은 머리칼 한 움큼을 뭉친다. 그걸 보고 있으면, 어머니의 지문이 다 닳아져 우리 둘 외의 다른 머리칼로 변한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한 달에 한 번 다녀가실 때마다 못난 자식을 두고 가는 슬픔이 방바닥에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여, 버스정류장 앞에서 나는 그녀를 보낼 때마다 이번이 마지막으로 보는 게 아닐까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을 쓸..

거미의 암실/ 함기석

거미의 암실 함기석 활짝 핀 살구나무 가지에 노인이 목을 맸다 나는 하모니카를 불었다 노인의 귀에서 흘러나온 이상한 달빛에 우리 집은 빙산처럼 불타오르며 무너졌다 나는 하모니카를 불었다 밤마다 어머니는 맨드라미처럼 우셨다 누이는 연못의 물 위에 보름달을 그렸다 칼로 잘라 반쪽은 밤하늘에 걸어 놓고 반쪽은 아파하는 내 눈 속에 넣어 주었다 봄밤 내내 나팔꽃 속에서 아름다운 하모니카 소리가 강물처럼 흘러나왔다 그 까아만 소리들의 상처부위를 소금으로 씻어 어머니는 아픈 밥을 안치고 누이는 살구나무 늑골 속에 해를 묻었다 처참하게 타죽은 어린 꽃들의 영혼을 묻고 젖은 내 눈동자를 묻고 구름과 함께 연못 속 달의 뒤편으로 걸어갔다 어린 해바라기가 다가와 내 눈물을 씻어 주었다 노인의 생처럼 살구꽃이 지고 있었다 ..

라이카는 즈베츠도츠카를 모른다/ 박수일

라이카는 즈베츠도츠카를 모른다 박수일 이름을 남길 수 있는 개는 드물다 과분하게도 우주까지 날아갔으니 위대한 이름이 되어보자 원래 쿠드랴푸카라 불렸다 모든 아빠가 지어준 이름이니 아무렇게나 불려도 좋을 것 모스크바의 추운 뒷골목을 질주하던 체력으로 고된 훈련을 견딜 것 우주에 갔다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 거라 믿을 것 발사 후 선체 내 고온으로 인해 고통스럽게 죽을 것 대기권 재진입 시 독이 든 먹이를 먹고 안락사했다고 발표할 것 고온과 스트레스로 죽었든 독살당했든 어차피 죽을 운명일 것 영웅으로 기리고 추모해도 개는 역시 개일 것 그래도 너희들 같은 개새끼하고는 차원이 다를 것 즈베츠도츠카는 지구를 한 바퀴 돌고 무사히 귀환했다 그러나 해피엔딩일 것 다음부터 너희들이 먼 외계로 날아갈 것 -전문(p.1..

북양항로(北洋航路) 외 1편/ 오세영

북양항로北洋航路 외 1편 오세영 엄동설한, 벽난로에 불을 지피다 문득 극지를 항해하는 밤바다의 선박을 생각한다. 연료는 이미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지만 나는 화실火室에서 석탄을 태우는 이 배의 일개 늙은 화부火夫. 낡은 증기선 한 척을 끌고 막막한 증기선 한 척을 끌고 막막한 시간의 파도를 거슬러 예까지 왔다. 밖은 눈보라. 아직 실내는 온기를 잃지 않았지만 출항의 설렘은 이미 가신 지 오래, 목적지 미상, 항로는 이탈, 믿을 건 오직 북극성, 십자성, 벽에 매달린 십자가 아래서 어긋난 해도海圖 한 장을 손에 들고 난로의 불빛에 비춰보는 눈은 어두운데 가느다란 흰 연기를 화통火筒으로 내어 뿜으며 북양항로, 얼어붙은 밤바다를 표류하는, 삶은 흔들리는 오두막 한 채. -전문(p. 35-36) --------..

우오즈미 리에_『잘 듣는 습관』(발췌, 여덟 문장) : 강다영 옮김

『잘 듣는 습관』(발췌, 여덟 문장) 우오즈미 리에 지음 / 강다영 옮김 * 머리가 좋은 사람은 이해도 빠르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끝까지 듣는 것을 괴로워합니다. (···)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때는 참을성도 필요합니다. 이야기의 내용이 어떻든지 간에, 우선 끝까지 듣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p. 30-31) * 『말하기 교과서』에서 말하는 내용보다 '어떻게 말하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했는데, 듣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 콘택트, 자세, 표정, 목소리 톤 등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의사소통을 영어로 'non-verbal communication(비언어 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합니다. 심리학에서는 커뮤니케이션에서 말이 차지하는 비중이 20~30%이고, 나머지 70~80%는 표..

한 줄 노트 2024.01.05

냉장고 구역/ 정월향

냉장고 구역 정월향 비가 온다. 가을 느낌으로 온다고 했다. 그것이 무엇일까 생각한다. 브랜디 칼리 가빈 제임스 너버스 카나 그린나스를 넘어서 비가 내린다. 나날이 발전하고 있어, 라고 친구는 말했다. 냉장고를 끌고 가는 사람이 비를 맞는다. 빗방울이 동그랗다. 바닥이 온통 동그라미다. 저것도 맞고 이것도 비를 맞는다. 인정하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나뭇잎이 끄덕인다. 나무의 겨드랑이가 받아들인다. 서늘함을 받아들인다. 냉장고의 바퀴가 젖는다. 젖은 흙이 냉장고에 달라붙는다. 냉장고 속으로 흙이 들어갈 것 같다. 흙이 어디까지 가는지 알 수가 없다. 무수한 빗방울과 무수한 서늘함을 생각한다. 흙을 건너는 사람을 생각한다. 죽음이 가득한 무더기를 생각한다.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을 생각한다. 지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