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나는 세상 알고도 살았노라* 외 1편/ 김효운

검지 정숙자 2023. 12. 30. 02:31

 

    나는 세상 알고도 살았노라* 외 1편

 

     김효운 

 

 

  진 땅 마른땅 다 밟아 보고 첫눈에 선인을 알아보는 여자

  술잔에 달라붙는 하루살이 같은 사내들

  눈 하나 깜짝 않고 

  난장에 나온 오이인 줄 덜퍽 손목 잡는다면

  거침없이 닭 모가지 비틀 듯하는

 

  고락을 하는 입술에 침 바르며

  발소리 뜸할 때마다 책장을 넘긴다

  비워지는 발자국만큼 채워지는 책장

 

  명절 장에 나가듯 참여한 동네 백일장

  나는 세상 알고도 살았노라

  속내 털어놓으니 눈 밝은 이를 만나

  어엿한 시인 목록에 올랐다

 

  어머니 말씀대로 밥도 돈도 나오지 않는 시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가 함박웃음으로 

  엄마가 시인이라니 벙글어진다

  부끄럽다 생각한 적 없는 주점 간판을 새삼스레 바라본다

 

  나는 세상 알고도 살았노라

      -전문(p. 106-107)

 

     * 김소월의 시집 『진달래꽃』 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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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붉은 밤

 

 

  그녀의 얼굴이 어지러이 떠오른다

  그녀의 불운이 읊지 못하도록

  나는 줄곧 외면해 왔으나, 동지冬至,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은 길고 긴 밤에

 

  그녀 얼굴 위에 도무지로 깔린 얼음을 

  녹여주고 싶다

  우리 그만 동지同志가 되자

 

  붉은 팥이 흐물흐물 풀어지고

  홧병처럼 불쑥불쑥 옹심이 떠 오르면

  입천장이 데이도록 팥죽을 밀어 넣고

  좁고 동그란 목구멍을 후끈 달구고 싶다

 

  붉고 뜨거운 팥물이 흘러 들어가고

  얼음 단번에 녹을 것만 같다

  머리털과 눈썹에 내린 수심도 털어 주고

 

  동지는 목이 아주 길어

  얼음을 꺼내는 데 오래 걸리겠지만

  이제, 동지同志니까

 

  가자, 꽃 꺾으러 가자

      -전문(p. 9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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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붉은 밤』 에서/ 초판 1쇄 2023. 7. 20. & 초판 2쇄 2023. 9. 1. <시산맥사> 펴냄

  * 김효운/ 2020년『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목련틀니』, <바람시 문학회>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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