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나는 있다/ 이정란

검지 정숙자 2024. 1. 29. 01:02

 

    나는 있다

 

     이정란

 

 

  땅 어딜 밟아도 벨이 울렸어

  어딜 파도 까만 씨앗이었어

 

  새싹은 지축을 흔든 후 혼돈에 빠졌지

 

  말발굽이 지나가고 떨어져 나간 목에

  뒤엉킨 천둥 벼락의 뿌리가 돋아났어

 

  새끼 고양이의 이빨 같은 백설이

  무한으로 꽉 찬 세상의 난청을 녹여주었지

 

  영원을 사는 신의 이야기가 까무룩 낮잠이란 걸 알게 된 건

  미지의 불 한 덩이 덕분이었어

 

  한 점 내 안에서 출발한 우주가 폭발하고

 

  먼지 하나와 맞물려 공중의 틈 사이로 빠져나가

 

  은하가 되기도 어둠 한 알갱이의 고립이 되기도 했지

 

  하늘은 마음을 펼칠 때마다 열렸다 닫혔다

 

  미래의 옆구리에서 떨어진

  내 몸은 신의 언어

 

  시간의 톱니바퀴에 부서져 내릴수록 신은 미지에 가닿고

 

  비어 있음으로 시작되는 중심

 

  나는 지금 수십억 년 동안 나를 빠져나가는 중

 

  무심히 지나가기만 해도 튀는 시간에 휘청이며

     -전문-

 

  해설> 한 문장: 그런데 내가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존재의 근거이자 배경인 우주의 존재이다. 우주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우주의 한 일부분인 소우주로서 내가 그 속에서 끼어 있다는 것이야말로 확실한 존재 근거가 되는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최근의 가장 설득력 있는 우주론인 빅뱅이론에 의하면 태초에는 모든 에너지가 한 점에 모여 있었다가 약 137억 9,900만 년 전 대폭발을 일으켜 우주를 형성했을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대폭발 이후 대략 우주 밀도의 70%를 차지하는 우주 에너지와 25%를 차지하는 '암흑 물질'로 구성된 우주가 형성되었으며, 대폭발의 결과로 우주는 여전히 팽창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인은 이러한 물리학적 사실을 "한 점 내 안에서 출발한 우주가 폭발하고// 먼지 하나와 맞물려 공중의 틈 사이로 빠져나가/ 은하가 되기도 어둠 한 알갱이의 고립이 되기도 했지" 라는 주관적 진술로 응축하고 있다.

  이러한 우주의 존재가 내가 있을 수 있는 필요조건을 제공하고 있는데, 또 하나 나의 존재 근거는 바로 신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중세의 숱한 철학자들이 도전한 바 있는 신의 존재 증명에 대한 문제도 문제이지만, 중요한 것은 나의 존재 근거로서의 신의 존재이다. 그러니까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나를 존재하게 한 어떤 존재가 있어야 하고, 그 존재를 존재하게 한 존재가 있어야 하며, 이렇게 한없이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자신은 다른 원인에 의존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존재의 원인이 되는 존재, 곧 부동不動의 동자動子로서의 신의 존재에 이르게 되는데, 이러한 신의 존재는 내가 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나는 있다」는 이 시에서 시인이 "영원히 사는 신의 이야기"라든가 "내 몸은 신의 언어", 혹은 "신은 미지에 가닿고" 등의 표현을 통해서 자꾸 신의 존재를 소환하는 것은 이러한 사정 때문이다. (p. 시 26-27/ 론 168-169) <황치복/ 시인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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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나는 있다』에서/ 2023. 12. 27. <여우난골> 펴냄

  * 이정란/ 1999『심상』으로 등단, 시집『어둠 · 흑맥주가 있는 카페』『나무의 기억력』『눈사람 라라』『이를테면 빗방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