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문 엽서
이명
더 이상 도시에서는 할 일이 없었습니다
시멘트 벽에는 틈이 생기기 시작했고 그 틈으로
물결이 밀려들어 왔습니다
지붕은 우주로 통해 있었습니다
금이 간 창문이
던스턴 바실리카 스테인드글라스처럼 황홀했습니다만
방바닥은 백사장이 되고
밤마다 파도를 덮고 자는 습관이 버릇처럼 생겨났습니다
병이 깊어 기침마저도 밖으로 솟구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도시에서
당신을 만난 것은 가장 큰 행운이었습니다
다음에 오실 때는 배를 타고 오십시오
생각만큼이나 수심도 깊어 북명의 바다처럼 검을 것입니다
험한 길을 헤치며 오다보면
당신도 곧,
나보다 더 깊은 바다가 될까 염려됩니다만
오기 전에 문자 한 통 넣어 주십시오
이곳도
사람 사는 데라는 것을 소상히 알려 드리겠습니다
-전문(p. 13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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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터 동인 제8집 『시 터』 2023. 11. 30. <지혜> 펴냄
* 이명/ 2010년『문학과 창작』 신인상 & 2011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분천동 본가입납』『앵무새 학당』
『벌레문법』『벽암과 놀다』『텃골에 와서』『기사문을 아시는지』『산중의 달』, e-book『초병에게』, 시선집『박호순 미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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