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집에서 읽은 시

기사문 엽서/ 이명

검지 정숙자 2024. 2. 7. 02:06

 

    기사문 엽서

 

     이명

 

 

  더 이상 도시에서는 할 일이 없었습니다

 

  시멘트 벽에는 틈이 생기기 시작했고 그 틈으로

  물결이 밀려들어 왔습니다

  지붕은 우주로 통해 있었습니다

 

  금이 간 창문이

  던스턴 바실리카 스테인드글라스처럼 황홀했습니다만

 

  방바닥은 백사장이 되고

  밤마다 파도를 덮고 자는 습관이 버릇처럼 생겨났습니다

  병이 깊어 기침마저도 밖으로 솟구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도시에서

  당신을 만난 것은 가장 큰 행운이었습니다

 

  다음에 오실 때는 배를 타고 오십시오

  생각만큼이나 수심도 깊어 북명의 바다처럼 검을 것입니다

 

  험한 길을 헤치며 오다보면

  당신도 곧,

  나보다 더 깊은 바다가 될까 염려됩니다만

 

  오기 전에 문자 한 통 넣어 주십시오 

 

  이곳도

  사람 사는 데라는 것을 소상히 알려 드리겠습니다

      -전문(p. 13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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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터 동인 제8집 『시 터』 2023. 11. 30.  <지혜> 펴냄

  * 이명/ 2010『문학과 창작』 신인상 & 2011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분천동 본가입납』『앵무새 학당』

『벌레문법』『벽암과 놀다』텃골에 와서『기사문을 아시는지』『산중의 달』, e-book『초병에게』, 시선집『박호순 미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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