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緋
도플러 효과
전형철
잠깐 눈을 감았다 뜨면 매번 새로운 장면이 펼쳐진다 햇귀가 사각의 유리를 투과해 저서식물처럼 어룽거린다 그늘에 웅크리고 있던 공기는 숨은 해의 이동을 따라 경계를 천천히 박음질한다
기후의 표정을 읽는 것은 어제까지만 유효했다 빛은 발산하기 전 우주의 긴 터널을 통과하며 실선의 배후가 된다 그럴 때는 있던 것을 덜어내고 벽화로 가득 채운 무덤 양식을 떠올린다 초점이 흐려질 때까지 배후는 등이 떠밀린다
빛의 서문을 채색한다 우주 망원경에게 빨려든 성운들에게 가채를 하는 것은 가채를 얹는 불안과 같은 이치인지도 모른다 있는 색보다 더 많은 없는 색들로 가득 찬 우주에서 온 빛을 누군가는 해석해줘야 한다 우리가 볼 수 있거나 이름 부를 수 있게
돋아나는 싹은 이미 가을에 떨어질 곳을 점찍어 두었다 예고 없이 띄운 엽서가 도착할 즈음 빈 서가에 먼지는 나선의 잠에서 깨어났다 손목을 꺾고 대놓고 발길질을 해도 이곳에서는 모두 생각하는 곳으로 갈 수 있다 모조리 꿈꾸고 그렇게 믿는다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다시 오른편이 왼편으로
빈 병을 옆에 두고 소나무라 이름 붙인다 소나무 밖에 소나무밖이 있다 타고 마른 멍을 묽게 하려 물을 끌어올리는 선인장의 소리가 들린다 눈이 내리는 허공에는 천 개의 입술들이 울부짖는데
문 앞 돌길이 모래언덕이 될 때까지 참새의 눈에 깃든 천사가 갈까마귀가 될 때까지 밤이 사라져 커튼을 가릴 시간도 없이 나는 이 시대의 마지막 대역, 한 울음이 사람의 영혼을 관통했을 때 터지는 폭발음
그래서 바람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바람은 본질에 더 가까워진다
-전문-
▶빛의 질서보다 얼룩의 어둠 속으로(발췌) _이병국/ 시인· 문학평론가
「비緋 도플러 효과」를 먼저 살펴본다. 도플러 효과는 1842년 도플러가 제안한 물리 현상으로 파원에서 나온 파동의 진동수가 실제 진동수와 다르게 관측되는 현상을 말한다. 진동수가 다르게 관측되는 이유는 파원이 이동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관찰자는 자신에게 멀어지거나 가까워지는 빛/ 소리의 소스가 고정되어 있을 때보다 더 짧거나 긴 파장을 경험하게 된다. 그중에서 관찰자로부터 멀어질 때 빛은 빨간색으로 관측되는데 이는 파동의 진동수가 줄어들어 적색편이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 비緋'가 의미하는 붉은색은 멀어짐의 표상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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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은 우주 전반에 고르게 퍼져나가지만, 그것을 감각하는 주체의 감각은 저마다 다르다. 그리고 그것은 가까워지기보다는 멀어지며 종국에는 존재의 상실에 가닿는다. 열역학 제2법칙, 즉 엔트로피 법칙처럼 비평형에서 평형으로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도플러 법칙이 빛을 감각하는 상대적 관점에 방점이 놓인다면, 그로부터 야기하는 시간의 감각은 "문 앞 돌길이 모래언덕이 될 때까지" 엔트로피를 증가시켜 평형을 이루도록 한다. 빛의 질서가 야기하는 주체의 자리는 지극히 낮은 엔트로피의 상태이며 그것은 일종의 억압이라서 존재에게 비평형의 불안을 야기한다. 이 역설과 궁지의 상태, 불화와 균열의 질서 속에서 터져나오는 "한 울음이 사람의 영혼을 관통했을 때 터지는 폭발음"을 통해 주체는 평형, 즉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에게서 멀어짐으로써, 즉 빛이 가져다주는 질서를 상실함으로써 좀 더 본질에 가까운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전형철 시인이 "그래서 바람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바람은 본질에 더 가까워진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p. 시 137-138/ 론 155-156 * 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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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시』 2023-7월(403)호 <현대시가 선정한 이달의 시인/ 시 & 작품론> 에서
* 전형철/ 2007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고요가 아니다』『이름 이후의 사람』
* 이병국/ 201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시 부문 & 2017년 『중앙신인문학상』 으로 평론 부문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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