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가가 읽은 나의 시 30

이령_소수자와 윤리(시: 김소월, 랭스턴 휴즈, 정숙자)

소수자와 윤리 이령/ 시인 인간은 누구나 피투성被投性으로 태어나지만 결국 기투企投하는 존재이다. 어떤 사람도 선택적 출생을 부여받진 못했다. 힘차게 울며 엄마의 자궁 문을 열고 나와 보니 우리는 슬프게도 구속, 제약, 계약이라는 제도적 규율이 난무하는 세상에 던져진 단독자單獨者들이었다. 다시 말해 인간은 누구나 피투성被投性으로 태어난다. 그러나 인간은 현재를 넘어서 미래를 향해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던지는 실존 방식, 즉 기투企投함으로써 주어진 관습과 허위의식을 버리고 이성적인 인간으로 성장한다. 이것은 단순히 규범과 관습에 구속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더 나은 가치로 발전시킬 때 인간은 더욱 인간다워지고 비로소 집단체로서의 사회는 그 존재적 의미가 생겨난다는 말이다. 주목할 점은 주어진 계급제도에 속박..

박동억_사랑의 실천(전문)/ 꽃병 속의 피 外 : 정숙자

신작시: 꽃병 속의 피/ 실재와 실제/ 이슬 프로젝트-52 자선시: 액체계단/ 점화전(點火栓) 시인론: 박동억 신작시 꽃병 속의 피 외 2편 정숙자 진전을 내재한다 견딘 만큼 비옥해진다 고뇌가 덜리면 사유도 준다 그 둘로 인해 지속적으로 연역/발아하는 깊이와 빛을 질투하는 신은, 회수한다 (진정 고독을 사랑할 무렵) 그렇다고 잃어진 그것을 위조해 가질 순 없다 저쪽, 또는 우연만이 생산/보급하는 그것은 캄캄하지만 자칫 죽음에 이를 수도 있지만 결국 깨고 보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혹자만의 혹자를 위한 그 두껍디두꺼운 어둠 속 광학, 두 번 다시 얻을 수 없는 석벽의 삶 속의 앎 ---------------- 실재와 실제 알 수 없는 어느 공간에서, 나는 어둠과 두려움에 새파라니 떨고 있었지 왜 여기 홀..

권성훈_ 경인일보[시인의 꽃]/ 할미꽃 : 정숙자

《경인일보》발행일 2020-4-28 제18면 [시인의 꽃]할미꽃/ 권성훈(문학평론가, 경기대 교수) 할미꽃 정숙자 (1952~) 그 누가 밉게 보았나 저리도 다소곳이 고운 여인을 -전문,『감성채집기』, 1994. 한국문연 ▣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는 말은 눈에 보기 좋고 사랑스러운 것들을 우선 취하려고 하는 물욕으로 인해 생긴 말이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들도 사실상 그러한 것들을 곁에 두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망이 산과 들에 있는 꽃들을 옮겨 심거나 개량한 것에 불과하다. 4월과 5월에 개화하는 공경과 슬픈 기억, 전설 등의 꽃말을 가진 할미꽃은 그 이름 만큼이나 박대받은 불쌍한 꽃이 아닐 수 없다. 전해 내려오는 할미꽃에 얽힌 전설 또한 할머니가 등장하는데 그것은 공경의 대상이 아니..

김조민 시인이 만난 오늘의 시/ 무인도 : 정숙자

무인도 정숙자 서푼짜리 친구로 있어줄게 서푼짜리 한 친구로서 언제라도 찾을 수 있는 거리에 서있어 줄게 동글동글 수너리진 잎새 사이로 가끔은 삐친 꽃도 보여줄게 유리창 밖 후박나무 그 투박한 층층 그늘에 까치 소리도 양떼구름도 가시 돋친 풋별들도 바구니껏 멍석껏 널어놓을게 눈보라 사나운 날도 넉 섬 닷 섬 햇살 긴 웃음 껄껄거리며 서있어 줄게 지금 이 시간이 내 생애에 가장 젊은 날 아껴아껴 살아도 금세 타 내릴 우리는 가녀린 촛불 서푼짜리 한 친구로 멀리 혹은 가까이서 나부껴줄게 산이라도 뿌리 깊은 산 태평양이 밀려와도 끄떡없는 산 맑고 따뜻하고 때로는 외로움 많은 너에게 무인도로 서있어 줄게 -전문, 시집『열매보다 강한 잎』(천년의시작, 2006) ▣ 아직 한파가 몰아닥치진 않았지만, 우리의 정신은 ..

송기한_주조의 부재와 시의 내면화 경향(발췌)/ 이슬 프로젝트-43 : 정숙자

이슬 프로젝트 - 43 정숙자 그는 그 자신의 아나키스트// 어둠뿐인 슬픔뿐인 우울 하나 왕이 된 생애. 날마다 각오 각성하는, 그는 그 자신의 아나키스트 아방가르드. 자신 말고는 적군도 요새도 없는 그는 그 자신의 아나키스트 아방가르드. 문 밖 강물은 소리 없이 깊어지고 뒤꼍 대나무..

정숙자 시집 『이 화려한 침묵』「축복」/ 작품론 : 김밝은

《경기신문》2019-1-1 (화) 22면 [아침시산책]/ 김밝은(시인) 축복 정숙자 제가 만일 화가라면 해바라기 그리겠어요 그 높은 줄거리 아래 어린 나팔꽃도 그리겠어요 이윽고 두 줄기 한 몸이 되어 누구도 떼어놓지 못하게 될 때 제가 만일 화가라면 신의 축복을 전하겠어요 화폭 가득 금가루 같은 수많은 꽃송이를 그리겠어요 - 시집『이 화려한 침묵』명문당. 1993. ■ 희로애락을 뒤로 하고 어느덧 또 한 해가 가고 새해가 밝았다. 힘든 시간 속에서도 다가오는 날들에 대한 희망 때문일까. '축복'이라는 말에 눈길이 간다. 해바라기와 나팔꽃 줄기가 '한 몸이 되어' 끝내 어느 '누구도 떼어 놓지 못'할 얼굴은 누구일까. 죽음도 끝내 갈라놓을 수 없는 간절한 누구이거나 더 나아가서는 분단된 조국을 떠올리게도 ..

시인의 편지/ 이동재

시인의 편지 - 정숙자(1952~ ) 이동재 정숙자는 늘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있을 것 같은 시인이다. 시를 쓰는 틈틈이 편지를 쓰는 것이 아니라 편지를 쓰는 틈틈이 시를 쓰는 시인인지 모른다. 편지, 특히 연애편지는 모든 문학의 모태다. 한때 열심히 편지를 쓰다가 시인이 되고 소설가가 된 사람이 한둘이 아닐 테지만 정숙자 시인만큼 여전히 종이 편지를 즐겨 쓰고 있는 시인도 드물 것 같다. 편지는 그녀의 시의 모태이자 원천이고 인정이며 사랑이다. 젊은 날에 그녀의 여동생과 열심히 주고받던 그 편지는 이젠 가족의 경계를 넘어서 주변의 시인들과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부단히 띄우고 있는 인간 정숙자의 존재의 신호이자 기표다. 편지는 늘 시보다 따뜻하다 허공으로 띄워 보내는 꿈이 아니라 포근히 가 닿을 주소와..

금은돌_산문의 폐허에서 솟아나는 시(발췌)/ 이슬 프로젝트-15:정숙자, 해파리:이용임

『문학나무』2016-봄호 <신작 시와 산문> 에서 <시평> 산문의 폐허에서 솟아나는 시 금은돌 "시어는 산문의 폐허에서 솟아난다"(사르트르, 정명환 옮김, 『문학이란 무엇인가, 민음사』) 는 문장을 처음 만났을 때, 산문을 조금 더 열심히 써 보아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시를 ..

김윤정_ 꿈을 향한 운동 에너지/ 이슬 프로젝트-10 : 정숙자

『예술가』2015-겨울호/ 계간시평 혼돈의 시대와 생명 에너지의 회복(발췌) 김윤정 꿈을 향한 운동 에너지 부조리한 사회에 대항하는 행동은 80년대식 과거적 사태에 불과한 것인가. 국민들의 의식은 80년대적 의식보다도 더 저급하고 불완전한 것인가. 인터넷이라는 전일적인 소통의 매체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행동을 조직하는 일이 더욱 불가능해 보이는 것은 의식의 문제인가 주체의 문제인가 지도력의 문제인가. 이도 저도 다 문제되지 않는 것이라면 사실상 문제는 없는 것인가. 총체화된 혼돈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더 강력한 안정과 질서를 찾아 들어가게 하는 것인가. 가령 일상의 안녕에서 말이다. 가만히 있는 일, 조용히 숨죽이는 일 속에서 우리는 최저한도나마 안정과 질서를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이 모든..